▲지난 2017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이 진열되어 있다.
권우성
다시 5.18이다.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날의 아픔은 온전히 치유될 리 없다. 다행히도 용기 있는 자들의 노력으로 진실이 밝혀져 왔고 이제는 국가가 인정하는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5.18은 이제 한반도를 넘어 제3세계 민중들에게도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부당한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저항, 민주주의 수호 의지, 자치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빛나는 정신으로 남아있다. 그런데도 아직 그날의 진실을 덮고 폄훼하려는 세력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더구나 그는 학살과 내란의 장본인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세상이 나를 단죄하기 위해 '무고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눈' '국민을 학살한' 군대라는 오명을 덧씌운 대한민국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전두환 회고록> 1권 382쪽)
5.18 영령과 역사 앞에 석고대죄하고 자중해도 모자랄 이가 군의 명예와 책임감을 들먹인다. 그는 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엄연한 진실을 외면하고, 회고록을 통해 '오명' 혹은 '누명'이라고 주장해왔다. 그의 거짓과 왜곡은 두 차례의 출판금지 가처분 재판에서도 확인됐다. 회고록에 담긴 허위가 어떤 것인지 재판 내용을 통해 살펴보자.
[재판 1] 전두환 회고록 출간과 1차 출판금지 가처분2017년 4월 그는 자신의 장남 전재국씨가 대표로 있는 출판사(자작나무숲)를 통해 <전두환 회고록>이라는 세 권짜리 책을 냈다. 자신이 정권을 잡기 직전인 1979년부터 현재까지가 서술돼 있는데, 특히 1권 혼돈의 시대(1979~1980)가 가장 문제였다. 5.18을 전후한 시기와 관련된 왜곡이 곳곳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직후부터 거센 항의와 논란에 휩싸였다.
5.18 기념재단 등 5.18 단체들은 광주지법에 전씨 부자를 상대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책 내용이 거짓이어서 5.18 단체와 희생자 등의 인격권을 침해했으니 허위인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 배포할 수 없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삭제를 요청한 부분은 33곳이었다. 크게 보면 5.18 당시 △북한 특수부대원의 개입 △ 살상진압을 한 계엄군과 자신에 대한 옹호 △ 헬기 사격 사실 부정 등이었다. 전씨 부자는 "모두 공적 기록에 바탕을 둔 사실이고 공공의 이해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말로 그런가. 보고 싶지 않겠지만 확인을 위해 몇 군데만 살펴보자.
법원 "북한군 개입설, 자기모순적 주장"
"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
"5.18 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계엄군의 잔혹상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다. 헬기 기총사격은 국방부 특별조사위 조사결과와 주한 미대사관 비밀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은 국방부나 정부도 이미 부정적인 답변을 여러 차례 밝혔다. 미국 중앙정보국 1980년 5월 9일 자 비밀문건에서도 북한이 군사행동을 취할 기미가 없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2016년 6월 월간 신동아 인터뷰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 관련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없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었다. 그런데 회고록에서는 지만원씨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며 북한군 개입설을 밀었다. 법원은 이에 대해 "5.18을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여 재편집한 부분은 일구이언의 자기 모순적 주장으로서 신빙성이 전혀 없"다고 꼬집었다.
법원은 이 내용들이 5.18의 성격을 왜곡하고, 관련 단체나 참가자들의 인격권을 침해했다고 보았다. "5.18 참가자들 전체를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함으로써 사회적 가치, 평가를 저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법원은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과 관여한 바가 없거나 책임이 없고, 당시 군인들의 시민들에 대한 시위진압행위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며 발포명령은 없었다'는 주장도 허위라고 판단했다.
결국 2017년 8월 법원은 5.18 단체들의 손을 들어줬다. 문제가 된 33곳을 삭제하지 않고는 출판할 수 없다는 결정이 나왔다.
[재판 2] 회고록 재출간과 2차 출판금지 가처분두 달 뒤인 2017년 10월 전씨 부자는 삭제 명령을 받은 부분만을 검게 가린 채 다시 회고록을 발행했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도 온전할 수 없었다. 여전히 심각한 허위사실과 인격권 침해 내용이 어렵잖게 발견되었다. 무려 40곳에 달했다. 5.18 단체들은 다시 가처분신청을 냈다. 회고록 내용이 얼마나 황당한지 몇 가지만 정리해서 언급해본다.
- 계엄군이 시민들을 학살해 암매장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무장시위대가 광주교도소를 집요하게 공격한 목적은 북한 지령을 받고 미전향장기수 등을 해방하여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은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공수부대의 자위권발동이었다.
- 나(전두환)는 광주에서 진행되는 작전상황과 관련해 조언이나 건의를 할 수조차 없었다.
모두 거짓이다. 법원은 회고록에 대해 "과거사위 보고서 등 충분히 입수 가능한 자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의 내란죄 등 범죄사실과 관련하여 확정된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마저도 부인하면서 허위사실을 적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법원은 지난 14일 5.18 관련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는 40곳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 배포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위반시 1회당 5백만 원의 지급도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