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광주항쟁 당시, 광주기독병원의 원목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가 그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 사진. FMJ탄은 탄환 끝이 약한 금속으로 되어있어, 인체에 맞으면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 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찰스 베츠 헌들리
첫 답신에서 허 목사가 항쟁 당시 목격한 것을 가지런히 정리한 것을 넘어서 깊게 연구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 목사는 계엄군의 탄환이 당시 국군이 널리 사용한 풍산 금속의 FMJ 라는 점과,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총상 부위가 항쟁이 격화함에 따라 상부 몸통에서 두개골 정밀 타격으로 옮겨간 점을 지적했다.
최초 발포 명령자를 아직 찾아내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 속에서, 허목사가 지적한 계엄군 집단 발포의 패턴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전문적 분석이 더 필요하겠지만, 보통 비무장 군중 진압용 실탄 사격은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몇 차례 경고 후 하반신 아래를 겨냥하는 게 국제적 규범이다.
초기 총상이 시위대의 상체에 집중됐다면, 계엄군은 애초부터 해산이나 진압이 아닌 살상을 위해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또한 이후에 두부 총상은 살상이 보다 정교하고 조직화됐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말하자면, 계엄군의 실탄 사격은 진압이나 해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 애초부터 살상을 목적으로 시작했고, 그 후 살상을 위해 정교화 됐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군인들이 물러나자, 폭력이 끝났다"그렇게 첫 이메일이 오간 이후, 허 목사와 나는 그 후 한 달여 기간 동안 1주일에 서너 차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허 목사도 궁금한 게 너무 많았고, 나도 묻고 싶은 질문이 차고 넘쳤다.
허 목사는 촛불혁명 이후 한국 상황에 대해 궁금해했다. 나는 허 목사가 던지는 질문에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간단히 설명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영문 기사나 동영상 링크를 보냈다. 허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의 5.18 기념 연설 영상을 보면서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허 목사는 나의 간단한 질문에도 언제나 매우 장문의 답변을 주곤 했다. 글의 내용이나 깊이로 봤을 때 자서전 삼아 정리한 원고에서 내가 하는 질문에 맞춰 그때그때 정리해서 글을 보내는듯 했다.
허 목사는 광주항쟁을 둘러싼 '논란 아닌 논란' 몇 가지에 대해서는 묻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답변하기도 했다. 광주항쟁이 북한과 무관하며, 항쟁 기간 중 시민군이 북한 간첩 용의자를 체포하여 계엄군에 넘긴 사건도 증언했다. 과격 시위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당시 신군부의 해명에는 여전히 조용한 분노를 삭이고 있는듯 했다. 사학도이자 문학도이기도 한 허 목사는 열흘 간의 항쟁을 다음의 한 마디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군인들이 광주에서 물러나자, 모든 폭력이 종식됐다.""떠날 수 없어 남았다"외국인 선교사라는 지위 덕에 계엄군의 직접적 폭력을 피할 수 있었으나, 허 목사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 모두는 항쟁 이후 외상후장애(PTSD)를 겪었다. 성직자로서 엄청난 폭력을 목도한 탓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광주라는 비극 앞에서 단순한 관객으로 머물지 않았다. 헬기 사격을 증언한 피터슨 목사는 AP통신 테리 앤더슨의 통역을 맡아 광주를 누비고 다녔고, 독일어에 능통한 허 목사는 영화 <택시 운전사>의 실존인물인 독일인 TV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그의 집에 머물게 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희생자를 매장하는 한 산기슭으로 힌츠페터를 데리고 간 것도 허목사 부부였다. 마샤에 따르면, 그날 26명의 청년들을 땅에 묻었는데 호남 신학대생 1명을 포함한 3~4명의 희생자는 평소 허 목사 부부가 알고 지내던 교회 청년들이었다.
계엄군의 광주 재점령을 앞두고, 미군은 헬기까지 동원해 선교사와 가족들을 송정리 미공군 기지로 이동시키려고 계획했지만, 피터슨 목사와 허 목사,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광주 시내에 남기로 결심했다.
어린 자녀가 있으니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5일간 지속된 밑도 끝도 없는 참상을 목격한 직후였다. 계엄군이 다시 올 경우 무고한 광주 시민은 커녕 성직자의 지위나 미국 국적인 그들의 안전조차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
18년 동안 섬겼던 도시와 사람들을 남겨놓고 그냥 떠날 수가 없어서 남기로 했다."그날, 떠날 수 없어서 최후까지 남았던 사람들은, 도청 밖에도 있었던 셈이다.
사진과 증언5월 항쟁 당시 광주에 있던 외국 선교사들 대부분이 각자 나름의 기록을 남겼다. 잘 알려진 대로 피터슨 목사는 그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에 대해 기술했고, 언더우드 목사 부부도 일부 출간된 비망록을 남겼다. 허 목사는 항쟁 내내 거리에서, 그리고 광주기독병원에서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사택 지하실의 암실에서 현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망자와 부상자 사진의 대부분은 허목사가 찍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허 목사는 사진 일부를 힌츠페터를 통해 처음 세상에 내놨다. 허 목사는 자신이 찍은 항쟁의 참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다. 목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항쟁 이후 기독병원으로 부상자를 위문하러 온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조언을 구했다. 그런데 한국인 목사 김장환은 외국인 허 목사가 항쟁의 사진을 갖고 있다고 전두환 정부에 전했다.
이를 우연히 전해들은 허 목사는 경찰의 압수 수색에 대비했다. 중요하지 않은 사진은 찾기 쉬운 장소에 갖다 놓고, 중요한 사진은 깊숙이 숨겼다. 다행히 경찰 조사도 수색도 없었다. 외국인 선교사 사저를 뒤져서 항쟁 유혈 진압 이후 가뜩이나 험악해진 국제 여론을 악화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전두환 일당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진은 광주 천주교계로 전달됐고, 허 목사의 독일 교단본부를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탄환 파편을 들고 미 대사관을 찾아가다5월 항쟁의 유혈 진압 직후, 허 목사는 부상자들 몸에서 제거한 탄환 파편을 들고 서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학살을 비난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한국 내부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게 미 대사관 직원의 답변이었다. 허 목사가 더 자세히 밝히진 않았지만, 당시 허 목사의 청원이 상당히 거셌던 것 같다. 그 후 허 목사는 '광주의 장로교 선교사들을 더이상 존경할 수 없다'는 미 대사관 직원의 말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미국 정부가 광주항쟁에 대해 자체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 목사는 1980년 6월 미 대사관을 통해 광주에 온 미 국무성 조사관을 만나 장시간 인터뷰도 했다. 1980년 6월 19일의 미 대사관 전문은 허 목사의 표현을 빌어 광주항쟁을 미국 독립전쟁의 발단이 됐던 보스턴 차 사건에 비견했다. 허 목사는 또 미 CIA 조사관과도 장시간 인터뷰했다고 한다. 하지만 허 목사의 증언이 반영된 CIA 보고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허 목사는 1981년 독일 장로교단에서 파견된 조사관과도 만나서 항쟁의 진상을 설명했고, 조사관이 건넨 미화 5000불을 갖고 부상자와 가족들을 도왔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지냈던 1982년에도 인권운동가와 정치인들을 꾸준히 접촉해 광주항쟁을 알렸다. 그 일은 1984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 할 때까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