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노래유고시집 <반도의 노래>. 박래전의 49재에 맞춰 세계출판사에서 출판했다.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우리가 잊으려 해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겨울꽃, 시인 박래전(1963~1988), 그는 우리 시대의 경고등 같은 존재입니다. "존재였다"라고 안 쓰고 "존재다"라고 쓰는 이유는, 그가 온몸으로 싸웠던 그 투쟁이 아직 현재형이기 때문입니다. 발터 벤야민이 그랬었지요. 시인은 온몸으로 화재경보기가 되어야 한다고.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경고음을 켜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발터 벤야민「긴급기술지원대」『일방통행로』)박래전은 학생운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를 썼던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은 유고시집 『반도의 노래』(세계출판사, 1988)로 묶였습니다. 그의 시들은 "어두운 시대를 참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인간의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동화」 외에도 그의 모든 시는 시대의 경보기들입니다.
"여름이면 참외 토마토 / 짬나면 똥장군도 져 보며 / 유리알 길 미끄러운 겨울날 / 뻥튀기 리어카를 끌었던 / 아버지"(「아버지의 고독」)의 아들로서 박래전은 시대의 경보기를 울렸습니다. "나는 대학생이 아니다 / 지금 여기서 나는 노가다 판의 질통꾼"(「질통」)으로서 박래전은 비상경보기를 울렸습니다. "아시안 게임 반대를 외치다 / 구류 15일을 살고 나온"(「모순.1」) 위반자로서 박래전은 비상경보기를 울렸습니다. "이노무 새끼들아 / 어떡하려고 두 형제가 다 유치장에 있어"(「어머니 말씀」)라며 절규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박래전은 비상경보기를 울렸던 것입니다.
1988년 6월 4일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분신해 숨진 숭실대 인문대 학생회장 박래전(당시 25살)은 비극의 심지를 자르기 위해 스스로 화재경보기가 되어, "돌아오지 못 할" 저 편으로 갔습니다.
이날은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 100일째였습니다.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박래전은 3통의 유서를 학생회실 책상 서랍 속에 남겨두었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져 외쳤던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 파쇼 타도하자",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는 세 마디는 아직도 우리 게으른 양심을 죽비처럼 때리며 일깨우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들에게 기억되길박래전의 시 「동화」 읽을 때마다 윤동주의 「서시」를 읽을 때만치 서늘한 긴장을 체험합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했던 실천, 그러면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다짐을 박래전의 「동화」에서 다시 선명하게 만나는 것이죠. 박래전은 걸어야 할 길을 확실히 써놓고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인 문익환 목사님은 윤동주에게서 비롯된 희생 제물들의 헌신(獻身)을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
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
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달 먼저 났지만
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
너의 영원한 젊음 앞에서
이렇게 구질구질 늙어 가는 게 억울하지 않느냐고
그냥 오기로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할 수 있다만
네가 나와 같이 늙어가지 않는다는 게
여간만 다행이 아니구나
너마저 늙어간다면 이 땅의 꽃잎들
누굴 쳐다보며 젊음을 불사르겠니
김상진 박래전만이 아니다
너의 '서시'를 뇌까리며
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은
후꾸오까 형무소
너를 통째로 집어삼킨 어둠
네 살 속에서 흐느끼며 빠져나간 꿈들
온몸 짓뭉개지던 노래들
화장터의 연기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던 너의 피묻은 가락들
이제 하나 둘 젊은 시인들의 안테나에 잡히고 있다
ㅡ문익환,「동주야」전문.
문익환 목사님은 친구 동주의 삶에서 "김상진 박래전"을 보았던 것입니다. 문 목사님은 윤동주의 "서시를 뇌까리며/민족의 제단에 몸을 바치는 젊은이들" 이름에 박래전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30년 전, 박래전(당시 만 25살)은 비극의 심지를 자르기 위해 스스로 화재경보기가 되었습니다. 아직 그의 뜻은 쉽게 부활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쓰러져야 할지…그가 그렇게 온몸을 살려 외쳤건만 아직도 분단된 조국은 비정규직과 궁핍한 농민의 눈물에 찌들고 있습니다.
매년 6월이면 그의 기일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그의 뜻을 이으려 합니다. 그의 형 박래군은 온몸으로 동생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올해 30주기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더 많은 이들이 시인 박래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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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친구 윤동주의 삶에서 박래전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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