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일 좌상
정만진
조양회관 앞에는 대구의 대표적 독립지사 중 한 사람인 서상일(徐相日, 1887∼1961)의 좌상이 세워져 있다.
1887년 7월 9일 태어난 서상일은 22세이던 1909년 안희제, 김동삼, 윤병호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1910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를 졸업할 때에는 한일합방에 항의하여 9인 결사대를 조직, 서울 주재 9개국 공사관에 독립선언문을 배포한다. 1917년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암은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감옥에서 출소 후 동암은 인재 양성과 국민의식 진작이 민족의 진정한 독립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인식,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다.
'의식분자들의 결집이 절대로 필요함을 생각하고 있던' 동암은 '조양회관을 건립하여 주로 의식분자들의 결집과 계몽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1957년 8월 발표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먼 길>의 표현).' 많은 인사들이 조양회관 건립에 동참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천에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독립지사 백남채(白南採)만이 벽돌을 제공했다.
거의 혼자서 조양회관을 건축하는 서상일서성일은 거의 혼자 재정을 부담하여 (달성공원 앞 옛 원화여고 자리에) 대지 500평, 건평 138평의 2층 건물 '조양(朝陽)회관'을 지었다. 압록강에서 가져온 낙엽송 통나무를 사용하여 목조 부분을 지었고, 바닥도 그 나무로 깔았다.
외관은 붉은 벽돌로 장식했는데 한국인 건축가 윤학기가 설계, 백남채가 공사 감독을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를 초빙해서 일을 시켰다. 창문의 둘레는 화강암으로 정착시켰다. 웅장한 천장에 통나무 대들보가 걸쳐져 있고 기둥이 없는 점은 조양회관의 특징 중 한 가지였다. 서상일은 이 목조 건물에 '아침(朝)에 해(陽)가 가장 먼저 비치는 집'이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은근히 민족의식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참고] |
1928년에 제작된 <대구 조양회관 개요>의 '연혁'에 '서력(서기) 1921년 봄에 몇 명의 동지가 서로 만나 대구구락부 기성회를 조직하고 부관(조양회관) 건축의 회의를 진행할 때 당시 이에 상응하는 동지는 만강의(가득한) 성의를 다하여 각자 부관이 이루어지기를 기약하면서 의연금을 변출하고(나누어 내고) 회(대구구락부 기성회)의 진행을 위하여 사신(몸을 던져) 노력함에 있어 회의 기운은 자못 왕성하다'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
동암은 조양회관을 대구 청년들의 정신적 구심지로 만든다. 1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만이 아니라 회의실, 사무실, 인쇄공장, 사진부에 오락실까지 갖춘 조양회관에서는 시국,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관한 강연회가 줄을 이었고, 밤에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실시했다.
<농촌>이라는 잡지도 발간했다. 일제는 조양회관을 모질게 탄압했다. 결국 조양회관은 1930년대 후반 들어 대구 부립(현재의 시립) 도서관으로 사용됐고, 심지어 태평양전쟁 막바지에는 일본 보급 부대가 주둔했다. 해방 직후 서상일이 정치 활동을 하자 한민당 사무실로도 쓰였다. 6․25전쟁 때는 군대의 병영이 되기도 했다.
1961년 군사정권, '좌파' 서상일을 구속조양회관이 다시 조양회관으로 제 면모를 찾게 되는 때는 1954년이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55년에 원화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학교 교무실로 변했다. 그 후 1980년 학교 부지가 건설회사에 넘어감으로써 조양회관은 끝내 헐리는 운명을 맞았다. 해체되었던 건물은 1982년 지금 자리에 복건됐다.
3․1운동 때 투옥됐던 서상일은 1929년 10월 18일 장진홍 의사의 조선은행 폭파 사건 가담 혐의로 재차 구속된다. 해방 후에도 서상일의 생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했지만, 이승만 독재에 항의하다 또 구속됐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해방 이후에도 구속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뿐이 아니다. 1961년 5.16 직후에도 군사정부에 의해 기소됐다. 마침내 서상일은 재판이 계류된 상태에서 1962년 4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신간회 초대 대구지회장 이경희광복회관 앞에는 서상일 지사의 좌상 외에 또 하나의 조각 작품이 있다. 신간회 초대 대구지회장 이경희(李慶熙, 1880.6.1.∼1949.12.4.) 지사를 기려 세워진 '愛國志士(애국지사) 池吾(지오) 李慶熙(이경희) 功績碑(공적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경희 지사는 1880년 6월 1일 '경북 달성군 공산면 무태리(현재 대구광역시 북구 서변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전역의 합동 의병 부대인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 3대 의병대장 이주(李輈, 1556∼1604)의 11대손이다.
교남교육회, 달성친목회 등 계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광문사가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키기 직전인 1906년에 설립한 사립 협성학교 교사를 지내던 이경희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신민회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신민회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펑텐(奉天, 현재 심양) 달신학교 교사 등으로 활동하던 이경희는 1919년 3.1운동 이후 서울로 돌아와 조선노동공제회, 단연동맹회 등에 가입한다. 특히 그는 1923년 의열단의 제2차 암살 파괴 계획(일명 황옥 사건)에 참여한다(의열단 가입은 19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