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2월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이희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부장판사를 '파면해 달라'는 국민청원을 청와대가 법원에 전달한 것을 두고 법조계가 시끄럽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 4일 성명에서 "법원의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사법부 독립은 엄정하게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현직부장 판사도 법원 내부망에 글을 올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성명서를 채택하도록 전국법관회의에서 안건으로 논의하자"라고 제안했다. 여기에 다수 대표법관들이 동의를 표하며 다음달 10일에 열리는 법관회의에서 실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같은 반응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기는 어렵다. '사법부의 독립', 특히 행정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중요하다. 과거 독재정권에서 사법부가 권력에 굴복하며 벌어진 불행한 역사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최근 사법부는 박근혜 청와대와 당시 대법원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판을 두고 교감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또 한번 신뢰를 잃었다. 그러니 이번 청와대 조치의 적절성 여부를 떠나, 법관들이 이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행정권력뿐 아니라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될 때 굳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법원은 삼성이라는 '자본권력' 앞에 한없이 초라하다. '현직판사 파면'이라는 다소 무리한 청원이 등장한 것도 결국 삼성을 바라보는 법관의 시선에 국민들이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재벌에 관대하다'는 비판이 사회적으로 제기됐지만 이에 목소리를 내는 법관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또 삼성 관련한 재판을 맡은 강민구 부장판사가 삼성 수뇌부에 인사청탁성 문자를 보낸 것에는 얼마나 문제 제기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언론에 자기 판결 언급하는 판사, 침묵하는 동료들이번 논란의 출발점이었던 정형식 부장판사의 판결부터 다시 살펴보자. 그는 국정농단 사건의 '스모킹건'(Smoking gun, 결정적 증거)으로 불리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재용 부회장의 형량을 대폭 낮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에서 '승마지원' 요구가 있었고 이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이 수첩에 기록했지만, 정 부장판사는 이를 정황증거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종범 수첩'은 다른 국정농단 재판에서 모두 일정부분 증거능력이 인정됐다. 판사는 오로지 '법리와 증거,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결한다고 한다. 법리를 해석하는데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판사와 저 판사가 완전히 상반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대법원은 '판례'를 만들어 그 기준을 세운다.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에 관한 판례는 이미 세워져 있었다. 다른 판사들은 이 판례에 따라 증거를 판단했다. 그렇다면 정 부장판사만의 다른 판단은 '양심'의 차이라고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 (관련기사 :
'안종범 수첩' 증거능력 또 인정, 이재용 판결 뒤집힐까)
정 부장판사는 또 판결 다음날 일부 언론을 만나 "법리는 명확했다. 석방 여부를 고민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법리가 명확하다면 석방 여부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법리에 따라 구속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석방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이 말은 역설적으로 정 부장판사가 이 부회장을 석방하려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백'과도 같다. 판사가 판결 후 언론을 만나는 것 역시 전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판사는 판결로 말해야 하고, 그것이 정당하다면 굳이 언론에 변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 부장판사 판결을 두고 법원에서도 반박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김동진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재용 판결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짧은 글을 올렸다. 법원에서 나온 반응은 그게 전부였다. 이후 <오마이뉴스>가 만난 여러 판사들은 정 부장판사가 일부 언론을 만나 인터뷰한 것에 공통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법원은 왜 재벌에게, 특히 삼성에 관대한가'라는 국민적 의구심에는 어떠한 말도 없었다.
고위 법관의 부적절한 행동, 계속돼도 괜찮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