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응 생가 금전고택
정만진
세 번째로 유명한 집, 아니 유명해져야 할 집터는 최종응 생가터이다. 최종응 생가터는 현재 빈 터만 남아 있는 상태가 아니라 훤칠한 얼굴을 뽐내는 한옥을 한 채 품고 있다. 집 가운데 대청마루에는 '琴田古宅(금전고택)'이라는 현판도 붙어 있다.
갓 신축된 집을 고택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독립운동가의 역사가 서려 있으니 그 이름으로 복원을 해도 무리는 아니다. 건축된 지 몇 년 안 된 비슬산의 '대견사'보다 신라 고찰이 있었던 자리인 '대견사 터'가 더 유명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금전고택이 당장 백불고택과 보본당처럼 유명세를 떨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민간 주택과 아직 목재에 먼지도 제대로 묻지 않은 새집을 그냥 견줄 수는 없다. 다만 이 집이 독립운동가 금전(琴田) 최종응의 고택을 되살린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만은 모두가 알아야겠다.
1871년 8월 21일 이 집에서 최종응이 태어났다. 1920년 최종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금을 모으고 있던 윤철(尹喆)의 권유를 받고 독립자금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를 경상북도 선정사(宣政使)로 임명했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에 지방행정기관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부호들에게 독립군 군자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송금
최종응은 도내 인사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납부하라는 '군자금 납부 명령서(軍資金納入命令書)'를 발송했다. 영천군 금호면 오계리의 조석환(曺奭煥), 영천군 청통면 상리동의 손계창(孫啓昌), 칠곡군 지천면 금호동의 윤병돈(尹炳敦) 등이 호응하였다. 최종응은 모급된 돈을 임시정부로 보냈다(모금에 협조한 이들의 명단을 이곳에 기록하는 것은 필자가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한몫을 한 것으로 인정되어야 하고, 역사에 이름이 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종응의 활동이 일제에 노출되지 않을 리 없다. 1922년 3월 30일 최종응은 소위 '공갈 및 제령 제 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에게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운동가 공훈록'의 최종응 부분 |
생몰년도 : 1871.8.21~1944.1.24 / 출신지 : 대구 달성 운동 계열 : 군자금 모집 / 훈격(연도) : 애족장(1990)
공적 내용 : 대구 사람이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 경북 선정사로 임명되어 동지 고정일·윤철·이태훈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조달 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동년 9월 경상·충청·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조석환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그들에게 800원을 받아 임정 파견원 고일치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에 사는 윤병돈 등 경북에 거주하는 부호 수 명에게 2,000원 내지 5,000원을 요구하는 군자금 납입 명령서를 송부하고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이태훈에게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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