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주도하는 ITF 태권도를 창설한 최홍희 회장의 얼굴 동판.(전북 무주 태권도관 전시)
박정연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세계태권도연맹(아래 WTF)은 우리 남한이 이끌어왔으며, 북한은 국제태권도연맹(아래 ITF)을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오 대사의 말처럼 태권도도 한 뿌리였던 남북한처럼 원래는 하나였다.
태권도의 역사가 갈라진 데는 '최홍희'라는 인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 초대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육군소장 출신이기도 했던 그는 1966년 서울에서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했다. 한국·베트남·미국 등 9개 국가를 시작으로, 1년간 무려 40개국이 연맹에 가입했다. 원래 '태수도'라고도 불리던 이름을, 총회를 거쳐 '태권도'로 명칭을 바꾼 것도 최홍희가 협회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오늘날의 태권도가 있게 한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최홍희는 당시 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박정희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73년 주미대사관 참사관과 UN 총회 대표부로 일한 경력을 가진 김운용씨를 청와대로 불러 들여, 그로 하여금 세계태권도연맹(WTF)을 결성토록 지시했다.
그 이후 캐나다에 정착한 최홍희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시범단을 이끌던 중 우연찮은 기회에 북한과 접촉을 시도했고, 마침내 1979년 평양을 전격 방문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에게 자신이 창안한 태권도에 대해 직접 소개하면서 북한과 첫 인연을 맺었다. 그 이듬해인 1980년 10월에는 해외사범들을 포함한 15명의 태권도시범단을 구성, 평양에서 시범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최홍희식 태권도'가 북한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ITF를 북한이 주도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김운용 총재가 이끄는 WTF도 ITF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나름 국제스포츠무대에서 세를 키워가며, 우리 태권도를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지난 1980년대 초중반까지도 WTF는 전세계 회원국과 회원수뿐만 아니라, 국제스포츠계 영향력에서 ITF에 밀렸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WTF 태권도가 ITF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건 88서울올림픽이 계기가 됐다. WTF 태권도가 올림픽 시범종목으로 채택되면서 부터다. 지난 2017년 작고한 김운용 WTF 전 총재의 공이 컸다. 태권도를 올림픽정식종목으로 만들기 위해 당시 우리 정부도 WTF에 대한 지원에 적극 나섰다.
가입회원국수 경쟁에도 돌입했다. 북한이 주도하는 ITF를 의식한 게 분명하다. 일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해선 대회출전경비까지 대신 부담하는 등 공을 들인 덕에 WTF는 회원국수를 ITF 회원국수의 2배에 가까운 208개국까지 늘릴 수 있었다. WTF는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가입회원수에서 ITF를 앞서기 시작했고, 오늘날 국제스포츠무대에서 WTF가 가입회원국수나 전체 저변인구수, 국제대회 개최 규모 등 양적 측면에서 만큼은 나름 우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렇듯, 지난 반세기동안 WTF, ITF로 나뉜 양대 기구는 상호견제와 경쟁, 때론 반목과 우여곡절까지 겪으며, 각자의 방식대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코리아=태권도'라는 등식이 생긴 것도, 양대 태권도 기구가 일군 노력의 결과물이다. 어찌 보면, 한류의 시작도 K-POP이나 드라마가 아닌, 태권도가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달라진 경기 규정과 용어, 심지어 스타일마저 다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