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봄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14살 어린 나이에 철공소에 취직이 되어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 원을 받는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pixabay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리란 건 상상도 못 했었다. 40대 후반까지 펜으로 글을 쓸 기회가 거의 없었고, 필체도 썩 좋질 않아 혹시라도 누가 내 노트를 들여다볼까 두려워 글을 쓸 엄두를 못 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살아오며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던 나만의 얘기를 어딘가 직접 기록해보고 싶단 생각은 늘 갖고 있었다.
어느덧 컴퓨터가 없는 집이 없을 만큼 잘 사는 세상을 만나게 되어 이젠 때가 된 듯이 보였지만, 어린 두 아이에게 PC를 빼앗길 때가 다반사였고 어쩌다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좀 써 보려고 하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집중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A4 용지에 완성된 글 한편을 내 손에 쥐어 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인 적도 있었다.
1979년 봄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나는 14살 어린 나이에 철공소에 취직이 되어 점심 도시락을 싸가는 조건으로 하루 일당 천 원을 받는 소년 노동자가 되었다. 몇 년 뒤 큰형과 모아 둔 전세 보증금을 아버지에게 넘겨드린 뒤 부산에 있는 친구네 집 부엌 위 다락방에서 고향의 아는 형과 함께 지내며 신발을 만들어 수출 하던 국제상사를 다녔다.
한때였지만 음식 배달도 하다가 꽃이 피어 있는 지역을 벌과 같이 떠돌며 양봉 기술도 익혔다. 그러다 1984년 말엔 가난을 극복할 목적으로 두 형과 함께 서울 구로공단으로 올라왔다. 우리 삼 형제는 가리봉시장 근처의 다세대 주택에서 월세로 단칸방 생활을 하였다. 이 근처에서 1990년 중반까지 6년을 열심히 버티고 있었지만 방 두 칸짜리 전세를 구하고 부모님의 빚을 갚아 나가느라 우리의 생활 형편은 크게 나아지질 않았다.
더구나 나는 지난 10년 동안 힘든 노동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하며 지냈다. 어느덧 우리 삼 형제는 고난에도 몇 년 동안 야간 학원을 다니며 열심히 공부한 결과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였다. 그리곤 이듬해 한국방송통신대학을 모두 입학했다.
나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90년 중반에 국내 주택 보급률 1~2위를 겨루던 종합건설회사의 타워크레인 조종사 직업훈련생으로 선발되어 기술을 익힌 뒤 그 회사의 직원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지금까지 다수의 건설 현장과 조선업에서 타워크레인 조종사로 근무해 왔다. 그럼에도 여태껏 나의 속내를 툭 터놓고 얘기할 만한 상대를 못 찾았다.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살아온 것도 서러운 마당에, 내가 믿었던 사람마저 나의 이런 부끄러운 삶을 알고는 혹시라도 맘이 변하여 업신여기지 않을까 두려워 발설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럴수록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대나무 숲에서 발설하였던 신하처럼 나만의 얘기를 어딘가 쏟아 버리고 싶은 욕구는 더욱 강하게 잃었다.
손바닥 안 작은 일기장에 삶을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