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미군기지대추리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기름진 농토에는 미군기지가 건설됐다. 철조망의 경계속에서 새 건축물이 빼곡한 이곳에서 옛 농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유해정
"주민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아픔과 주민 이주에 따른 어려움을 겪게 된 데 대하여 정부가 유감을 표명한다." (2007. 2. 14 정부를 대표하여, 김춘석 주한미군기지대책단 부단장)2007년 2월 14일,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을 벌여왔던 대추리 주민들이 마을을 떠나기로 합의했다. 투쟁을 시작한 지 3년 5개월 만이었다. 정부가 사과하고 이주와 생계대책을 성실히 마련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정부는 '성공적 협의'라 말했지만, 대추리 주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했다. 김지태 이장을 석방시키기 위해선 다른 방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살자고, 우리를 대표해 앞장서왔던 사람을 차가운 감옥에 가둘 순 없었다. 그는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고, 어린 자식을 줄줄이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홀로 바깥에서 집 안의 모든 짐을 진 아내는 또 어찌할 것인가. 한 동네 사람끼리 차마 못할 짓이었다.
한 마을 주민이 아무리 똘똘 뭉쳐 싸워도 경찰과 군대로 무장한 정부를 이길 수가 없었다. 학교가 무너졌고, 마을은 전쟁터가 됐다. 보상금을 이용한 회유와 협박 앞에서 형님, 동생 하던 이웃들이 얼굴을 붉혔다. 수십 년을 함께 한 이웃이 원수가 돼 흩어졌다.
나고 자란 마을, 구석구석 삶이 어린 동네에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고 '도둑' 이사를 나왔다. 세간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협의한 날짜 안에 집을 비우지 못하면, 혹여 꼬투리를 잡아 합의를 불이행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죽어서도 다시 밟지 못할 고향을, 삶을 지탱해준 터전을, 그렇게 떠나왔다.
이주 11년 째. 근처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어, 농사를 지을 사람들은 오가는 데만 꼬박 두 시간 거리에 땅을 얻었다. 그조차 어려운 사람들은 공공근로로 삶을 연명해야 하는 인생이 됐다. 그나마 공공근로도 2014년 종료되면서 지금은 소일거리조차 없어졌다. 너른 들판의 활기를 품던 농민들이 마을회관에서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는 노인이 되었다. 이주 뒤에야 뼈저리게 알았다. 빼앗긴 건 땅이 아니다. 자부심과 활기였고, 생이었다.
하지만 정부 협의는 온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협의사항 중 주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두 가지다. 먼저, 이주단지 행정명을 '대추리'로 변경해주겠다는 약속이다. 행정지명 변경이 미뤄지면서 주민들은 행정소송을 냈다. 두 번째, 상업용지 분양 건이다. 생계대책의 일환으로 정부는 매수 대상이 된 600여 대추리 주민들에게 세대 당 8평의 상업용지 분양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 4월 LH는 이 합의를 무시한 내용의 분양 공고를 냈다.
대추리 주민들이 오는 5월 3일 대추리 행정대집행 11년을 맞아 청와대 앞으로 가는 이유다. 참고로 5월 4일은 정부가 12년 전(2006년) 대추리에 대한 강제행정대집행을 진행한 날이다.
다음은 신종원 대추리 이장과의 일문일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