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니스테레에서 받은 완주증
차노휘
외적으로 눈에 띄게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심지는 더욱 굳어졌다. 자존감을 높이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용기라는 것은 나이가 들수록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용기라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용기를 낼 수 있는 상황은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철저하게 낯선 공간에서, 무엇보다 언어가 다른 곳에서,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보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야 할 상황에서 힘이 더 세지는 법이다. 그것은 익숙한 공간보다는 낯선 공간이어야 했다. 우리나라보다는 외국이라는 곳이 더 적합했다.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귀국하는 비행기 날짜가 아닌 이상). 그런 곳이어야 했다.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글이 안 될 때는 호텔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하루치 숙박비가 아까워서더라도 글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베스트셀러 작가니깐 호텔비 정도는 부담스럽지 않아서 그럴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에도 충분히 공감했다. 외국에서 길을 걷는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모 베스트 작가가 호텔에서 글을 쓴다는 것과 비슷한 면도 있지 싶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 있겠어, 라고.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고 났을 때는 분명 보상이 있었다. 앞서 말한 자존감을 높이고 용기 있음을 새삼 발견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보폭'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내 보폭을 존중한다는 것은 남의 보폭 또한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경쟁 상대가 빨리 달리더라도 그 빠름에 경도되지 않고 되레 존중해 준다는 것. 걷다보면(살다보면) 목적지에 조금 일찍 도착할 수도 조금 늦게 도착할 수도 있다.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의 여유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용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나'가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 또한 신뢰하고 있다. 이것은 남과 비교하는(비교당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다른 말이다.
그래서 나는 걷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내 걷기는 장담하건데 숨을 쉬는 한 계속될 것이다. 작년 여름에 걸었던(프랑스 길), 이번 여름에 걷게 될 산티아고 순례길(포르투갈 길)은 세상의 길이란 모든 길을 걸을, 준비 운동에 불과하다. 그 길에 '글'과 동행할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내 걸음 걸이에 윤기를 더하면서 내밀한 이야기를 걸어 줄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걷는 그 길, 응원을 해주신(해주실) 분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