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송곳>은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미지급된 월급에 대한 지방노동위원회 심판 회의에 대표로 참석한 수인(지현우)과 강민(현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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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배경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가는 대형마트입니다.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다 같은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트에서 직접 채용한 정규직이 있고, 비정규직도 있고, 협력업체에서 파견을 보낸 직원도 있고. 겉으로 보기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고용형태에 따라 급여나 처우 등은 차이가 나는 현장이 작품에 그려져 있습니다.
외국계 대형마트 푸르미. 복잡한 노동생태계 안에서 나름대로 균형있게 운영되는 듯 보였던 이곳에 어느 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판매사원들을 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옵니다. 관리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 지시를 눈 딱 감고 따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불법이든 합법이든.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납니다. 판매과장 중 한 명인 이수인 과장이 그랬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성공을 꿈꾸며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군의 부정선거 압력에 복종할 수 없었던 사관생도. 이수인은 조직의 지시를 거부하고 자신의 소신을 말했다가 조직으로부터 노골적인 괴롭힘을 당합니다. 결국 이수인 생도에게 상해를 입히기까지 하는 조직. 이수인은 병원에 입원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다음에 같은 상황이어도 이렇게 후회할 선택을 하게 될 자신이 두렵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육사를 무사히 졸업해 장교로 복무를 시작하지만 군대에서의 노골적인 불법들에 저항하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10년 만에 전역했던 유별난 청년 이수인. 이런 청년이 외국계 유통회사에 들어와 만난 현실은 자신이 경험했던 사관학교,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수인이 지나온 삶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일어나는 일들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면 나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오는 동안 항상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던 이수인은 회사의 불법적인 해고 지시에도 또 걸림돌이 되는 선택을 하고 맙니다. 이수인 과장은 회사의 지시에 대항하고자 노동조합을 조직하게 되고 힘겨운 또 하나의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사관학교, 군대에서와 마찬가지로 회사에서도 걸림돌에 대한 반응은 비슷합니다. 회사의 명령을 따르는 상사와 동료들은 이수인을 괴롭히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합니다.
이수인은 고민하다 어려움에 처한 노동자들을 돕는 노동상담소를 찾아갑니다. 상담소에서 노동법을 강의 중인 구고신 소장의 말 중에서 이수인의 귀에 들어와 박히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말하는 듯한 말. "시키면 시키는대로 못 하고 주면 주는대로 못 받는 인간들. 세상의 걸림돌 같은 인간들". 노조에 우호적인 프랑스 회사가 왜 노조를 거부하는 것인지 이수인이 묻자 구고신 소장은 대답합니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사람은 대부분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는 거요. 노동운동 10년 해도 사장 되면 노조 깰 생각부터 하게 되는 게 인간이란 말이오.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1권 204-205쪽)
이 말은 정말 이 세상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입니다. 신입사원 때 '저런 선배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흘러 선배가 되면 내가 욕하던 선배의 모습이 되어 있기도 하고, 부모님께 듣기 싫었던 그 말을 부모가 되어서 하고 있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구고신 소장이 했던 저 말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규석 작가의 이런 대사들은 만화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와 마음에 박힙니다.
자신이 속한 마트의 지점에서 노조를 만들겠다는 이수인을 구고신은 만류합니다. 회사의 지시를 따라 판매직원들만 내보내면 되는, 자신의 싸움도 아닌데 섣불리 나서지 말라면서. 하지만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같은 인간"(1권)이었던 이수인은 싸움에 뛰어들고 맙니다.
다양한 노조파괴 전략과 노동자의 투쟁작품의 스토리는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직원들을 괴롭히는 회사의 다양한 방법과 그에 대한 노동자들의 대응으로 짜여져 있습니다. 업체의 향응 접대 자리에 있던 노조원을 모략해 해고시키기, 직원들의 약점을 잡아서 노동조합을 탈퇴하라고 압박하기,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 회유하기, 사문화된 취업규칙을 꺼내 사소한 트집을 잡아 직원들 괴롭히기, 교활하고 폭력적인 관리자 배치 등 회사의 노조파괴 전술은 다양하고도 집요합니다.
작품에는 위와 같은 회사의 집요한 공격들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노동조합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주요 등장인물 중의 한 사람인 노동상담소 구고신 소장은 변호인으로, 상담가로 때론 투쟁전략가로 노동조합을 도우며 투쟁을 이어갑니다. 헌법에 보장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기 위한 노동조합 활동이 투쟁이 되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회사의 압박과 회유에 굴복해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노동자들 간의 갈등, 노동조합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들의 고민, 정규직/비정규직/협력업체 파견직 등 속한 위치에서 오는 노동자 각자의 이익과 갈등, 노동운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노선 차이에 따른 노동운동 조직 간의 갈등 등이 작품 전반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노동조합을 조직해 가는 과정에서 회사의 전방위적 압박에 노조원들 간의 갈등이 커질 때 주인공 이수인 과장이 한 말에 노동조합의 역할과 목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의 위치 등이 인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가실 분들은 나가셔도 됩니다. 탈퇴한 분들은 배신자가 아닙니다. 모두가 같은 무게를 견딜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다 우리보다 먼저 쓰러진 것뿐입니다. 저는 부상당한 동료를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도 아직 노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저보다는 여러분들께 여러분들보다는 반달치 월급때문에 탈퇴한 사람들에게, 탈퇴자보다는 가입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입 자격도 불확실한 계약자들에게 노조는 더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 절실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지 않은 노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으시면 더 고생할 겁니다. 고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공하면 모두가 성공할 것이고 실패하면 아마도 우리만 실패할 겁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짐만 지세요."(3권 194-197쪽)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려면회사의 전방위적인 압박 속에 노동조합은 결국 파업이라는 마지막 투쟁카드를 꺼내듭니다. 회사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직장폐쇄라는 극단적 조치로 맞섭니다. 노동조합과 회사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주인공 이수인 과장은 말합니다.
"도망도 쳤고, 비겁한 순간도 많았고, 타협도 하면서 살았습니다. 절차 지켜서 정리해고 명단 올리라고 했으면, 아마... 눈 질끈 감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직원을 괴롭혀서 내보낼 수는 없는 거잖습니까? 사람마다 절대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잖아요. 우리 조합원들도 각자가 넘을 수 없는 선 앞에서 찾은 돌파구가 노동조합이었던 거겠죠."(6권 20쪽)
"하기 싫죠. 그런데 방법이 없어요. 차마 넘기 싫은 선 앞에 서기 전에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으면 사람끼리 상처를 주고받게 돼요. 제때 호루라기를 불어줄 심판이 필요해요. 더 많은 아군이 아니라..."(6권 2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