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5.18 기념재단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만나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 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윤상원은 '진짜 노동자'가 돼갔다. 윤상원 말고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이다. '야학(夜學)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했던 터라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라고 눈물로 적어 놓았다.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훗날 '혼령의 부부'가 된다.
그들에게 자비(慈悲)는 없었다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과 함께 1980년 5월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연대한 광주의 집회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정권을 찬탈하려던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목표로 삼았다. 바로 계엄군을 내려 보낸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지상에서는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공중에서는 무장 헬기가 콩 볶듯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졌다. 두부처럼 뭉개지고 잘려 나갔다. 어린 학생, 막 결혼한 신혼부부, 임신한 여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육신에 구멍이 뚫린 채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그 푸르던 날, 가정의 달이며 이 땅에 자비를 베풀러 부처님이 오신 날,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