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석릉배면에서 바라본 석릉의 모습, 무신정권 때 집권자의 입맛에 따라 왕을 폐위했던 사례를 희종의 석릉을 통해 알 수 있다.
김희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 소재한 석릉은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으로 등장한 바 있다. 총 5단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석릉은 1단에 돌로 쌓은 곡장과 봉분, 훼손이 심한 석인상이 하나 자리하고 있으며, 2단에는 표석과 함께 또 다른 석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석릉의 석인상과 관련해 <강화 고려왕릉의 석물연구> 논문에 따르면, 곤릉이나 홍릉, 가릉의 석인상과 달리 조각 수법이 다른 점을 들어 다른 곳에서 있던 석인상을 석릉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인상의 하부에서 확인된 시멘트 기초와 석릉과 관련한 기록에서 석인상이 등장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릉이 '부의 남쪽 21리에 있다'라는 기록을 통해 당시에도 피장자가 알려진 고려왕릉인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의 고려왕릉 중 가장 초라한 원덕태후의 곤릉보통 능이라고 하면 왕과 왕비, 대비의 무덤을 이야기한다. 왕과 달리 왕비나 대비의 경우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치적이나 자세한 에피소드를 알기는 어렵다. 곤릉의 피장자인 원덕태후도 마찬가지인데, <고려사>에는 원덕태후와 관련한 짧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