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대릉원에 자리한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표형분의 형태로 마치 낙타 등처럼 생겼다.
김희태
이처럼 조선왕릉에서 합장릉은 기본적인 골격을 갖춘 형태였지만, 신라왕릉의 경우 기록으로 확인된 합장릉의 사례는 흥덕왕릉이 유일하다. 물론 부부가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경우처럼 각각의 봉분으로 조성된 남분과 북분이 합쳐진 '표형분'의 사례가 있지만, 한 봉분에 왕과 왕비가 함께 합장된 사례는 신라의 왕릉 중 현재까지 흥덕왕릉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은 흥덕왕릉을 통해 장화부인과의 합장과 당시의 시대, 흥덕왕릉 이후 신라의 쇠퇴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장보고가 활약했던 흥덕왕의 시대, 흥덕왕 사후 왕위를 두고 벌어진 내전헌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흥덕왕(재위 826~836)의 이름은 수종 혹은 경휘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아들인 혜충태자(=혜충대왕)이다. 당시 혜충태자의 아들로는 소성왕과 헌덕왕, 흥덕왕과 함께 훗날 왕위에 오르는 민애왕의 아버지 김충공이 있다.
흥덕왕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왕족을 우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가진 왕족들이 서로 난립을 하면서, 훗날 왕위 계승을 두고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인겸)의 후손과 셋째 예영의 후손 간 내전이 벌어지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