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마주치는 장식물(그림)들
차노휘
혼자가 아니었다. 동행이 있었다. 전날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H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4명이 한 팀이 되어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레온에서 4인실을 독방처럼 사용했을 때 옆방에 묵었고 그 뒤로도 몇 번 부딪쳤지만 말 걸 틈조차 주지 않아 혹시 사이비 종교 수련회를 왔나, 할 정도로 부정적으로 보던 이들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은 외국인들에 비해 표정이 없어서 자칫 화를 내고 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나이가 많을수록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라도 그들 분위기는 냉냉했다.
이들 중 한 명인 '그녀(사진 찍기를 엄청 싫어한다. 그래서 본명은 밝히지 않고 '그녀'라고만 지칭한다)'는 배낭을 다음 알베르게까지 매번 보내버려서(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허리가방과 물병 하나만 들고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순례자라기보다는 동네 마실 나온 '편한 마나님' 같아서 되레 친하지 않은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봐도 홀가분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걸음은 느려서 늘 일행보다 50m 즈음 뒤처졌다. 뒤처진 그녀를 며칠 전에 봤지만 다른 세 명과 한 팀이라는 것은 어제 폰페라다에 왔을 때에야 알았다.
폰페라다를 떠날 때 우연찮게 같은 시간대에 걷게 되었다. 그녀는 으레 무리에서 떨어졌다. 나와 보폭이 거의 같아서 나는 아주 간단한 인삿말을 건넸다. 별 기대를 하지 않은 말 건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주 반갑게 내 인사를 받아주는 것이 아닌가. 몇 마디 더 말을 섞게 되었다.
'아, 그녀도 그동안 외로웠구나.'번뜩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을지도 몰랐다. 내 짐작이 맞았다. 그녀는 처음, 팀원에게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자신 속에 이는 감정을 어느 정도 초월한 상태였다. 팀원과 떨어져서 걷게 된 것은 걷기 시작한지 5일 뒤부터였다.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서 걸음이 느려졌고 물집이 잠잠해질 즈음에는 고관절에 이상이 생겼다. 심지어는 변기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치골 통증을 동반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 뒤부터 그녀는 배낭을 보내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라도 걸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일정을 존중해줘야 했다. 어떻게든 하루 정해진 코스를 가야 했다. 그것이 그녀를 제일 힘들게 했다.
그녀는 일행들과 보폭을 맞출 수 없게 되자 목적지인 알베르게만 알려달라 하고는 현지 가이드북을 사고 휴대폰 데이터를 충전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혼자 걷기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그녀에게 득이 되었다.
"생각해봐요. 아프지 않았다면 지금도 인솔한 대로 멍하니 따라 다녔겠죠. 아프고 혼자가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길을 찾드라구요. 길치인 내가 혼자 길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한 거예요."그녀의 얼굴은 생기로 가득했다. 나도 그녀와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우리는 말이 통했다.
"어느 날 말이에요. 정말 갈증이 났는데 물이 없었어요. 물론 살 곳도 없었죠. 내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나봐요. 나를 지나쳐가는 외국인이 그가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네는 거예요. 한 모금 마시고 감사하다며 건넸죠. 그러자 그는 그것을 가지라고 자기한테 한 병 더 있다고 하잖아요? 아, 천사가 따로 없더군요."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바에서 음료수를 마시거나 길가 과실수에 호기심을 보이며 설익은 그것을 맛보기도 했다. 종교는 없지만 혼자 아닌 혼자가 되면서부터 그녀는 눈에 보이는 성당이라는 성당에는 다 들어갔다. 그곳에 앉아 있으면 제일 마음이 편했다. 나도 그녀와 걷는 도중 성당이 보이면 들어갔다. 동행이 있다는 것, 그것도 내밀한 속 이야기를 '공통된 언어'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새삼스러웠다. 하지만 아쉬운 것도 분명 있었다.
그녀가 없었으면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 하기 9km 전에서 본, 사설 알베르게에서 나는 묵었을 것이다. 조그마한 시골 도로변에 있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아기자기한 알베르게를 봤을 때 얼마나 내 가슴이 뛰었던가. 그런 곳에서 한번 즈음 꼭 자보고 싶었던 나였다. 그녀를 따라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나는 멈출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나도 어느 사이 H팀원이 되어 있었다. 하루 정해진 코스를 어떻게든 완주해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