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동민청 위원장(왼쪽)과 김병태 동민청 사무국장(오른쪽)
민청련동지회
처음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지역상황을 파악해 나가면서 기존에 활동해 오고 있는 지역단체들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협조관계를 맺어나갔다.
성수지역에는 동부노동상담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모이고 있었고, 성수교회도 지역운동의 중요한 모임공간이 되고 있었다. 또 당시 국민운동본부에서도 활발하게 지역조직 건설을 하고 있었는데, 서울본부 성동구지부가 이 지역에서 막 조직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건대, 세종대 등 지역에 있는 대학의 총학생회도 연대대상이었다.
이 지역에 신입으로 활동을 시작한 민청련에 대해 기존 지역 활동가들의 반응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서울 시내 사무실에서 놀던 당신들이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어?'하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때마침 동민청 회원들이 지역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9월 초에 조흥운수라는 성수지역 택시회사의 운수노동자 이석구씨가 회사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동민청은 즉시 이 지역 운동단체들과 지역 총학생회들로 대책위를 꾸려서 회사를 상대로 한 농성에 돌입했다. 김성환 위원장 이하 민청련 회원들은 이 농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부에 연락하여 언론 홍보에도 노력하고 자체적으로 유인물을 만들어 지역주민에 대한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러는 사이에 기존 지역단체들과 신뢰도 차츰 쌓여갔고, 지역 청년들 사이에 민청련 이름을 알려 나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아남전자 쟁의에 대한 지원투쟁, 한양대 병원조조 지원투쟁 등 동부민청련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회원 수도 꾸준히 늘어서 이길수, 구광숙 등이 새로 가입해 대략 20여 명을 헤아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