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복사지 귀부숭복사지 귀부, 삼국유사에는 이 귀부에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이 세워졌다고 했다.
김희태
<삼국유사>는 '토함산 서쪽 숭복사에 원성왕릉이 있다고 했으며, 그곳에 최치원이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실제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에 자리한 '숭복사지'에서 최치원이 쓴 '유당신라국초월산대숭복사비명'의 비편이 확인이 되기도 했다. 원성왕릉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왕릉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의 왕릉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평가를 받는 원성왕릉이지만, 의외로 왕릉보다 더 이목을 집중시키는 건 따로 있다. 바로 왕릉 앞에 자리한 석물 가운데 하나인 호인상으로, 마치 서역인을 닮은 듯 이국적인 형태가 눈길을 끈다. 이러한 호인상의 존재는 과거 신라와 서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오늘은 원성왕릉을 통해 당시의 시대와 실크로드의 흔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알천(閼川)'의 홍수를 기회로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시대원성왕(재위 785~798)의 이름은 경신으로 내물왕의 12대손이다. 무열왕을 시작으로 혜공왕에 이르기까지 신라 중대는 무열왕계가 왕권을 이어왔다. 하지만 선덕왕(재위 780~785)을 시작으로 내물왕계가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원성왕의 즉위다. 원성왕의 형이었던 선덕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조정의 중신들은 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기로 하고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