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원의 문인석소경원의 문인석에서 바라본 모습, 비공개 지역인 탓에 찾는 발걸음이 뜸한 곳이다.
김희태
심지어 세자빈 강씨(1611~1646)의 경우 소용 조씨에 대한 저주와 자신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사사하는 등 소현세자 일가에 대한 핍박을 이어갔다. 결국 1647년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이곳에서 맏이인 경선군(1636~1648)과 차남인 경완군(1640~1648)은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막내인 경안군(1644~1665)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처럼 소현세자 일가의 죽음과 비극은 이후에도 여전했는데, 최초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소현묘(昭顯墓)'로 조성이 되었다. 보통의 경우 세자가 세상을 떠나면 '원(圓)'으로 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조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인조는 죽을 때까지 소경원을 찾지 않는 비정함을 보여줬다.
아내는 광명에, 가까이에 있는 아들은 군부대에세자빈 강씨 역시 그냥 넘어가지 못했는데, 1646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사사되었다. 이 여파로 소현세자와 함께 묻히지 못한 채 친정인 광명에 묘가 조성되었는데,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죽어서도 함께 하지 못한 비운의 부부가 되었다. 이후 숙종 때 신원이 회복되어 '민회빈'으로 추존되었으며, 묘의 경우 '민회묘(愍懷墓)'라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