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 중 피장자가 밝혀진 무령왕릉의 모습
김희태
심지어 무령왕릉 발굴을 두고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행운이라는 축하까지 있을 정도였다. 실제 무령왕릉에서 쏟아진 방대한 유물은 기록이 부족한 백제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히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묘지석을 통해 무령왕으로 확인되면서, 당시의 발굴은 전국적인 관심사로 확대되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기자들과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고, 박정희 대통령 역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에 관심을 보였다.
기적과 같은 발견 이면에 흑역사로 남겨진 무령왕릉의 발굴이러한 무령왕릉의 발굴은 실로 우연이었다. 비가 많이 와서 송산리 5호분과 6호분 사이에 배수로를 파내던 중에 삽 끝에서 벽돌이 발견되고, 이를 파내려 가자 둥근 아치형의 고분의 입구가 드러났다.
입구는 벽돌로 촘촘히 막혀 있었는데, 비가 와서 공사가 중단되다가 비가 그친 이후 입구를 열기 전 간단하게 제사를 지내고 막은 벽돌을 빼내면서, 역사적인 무령왕릉의 발굴조사가 시작이 되었다.
<김원룡 박사의 무령왕릉 발굴 회고담>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고분을 열었던 연구자들의 눈에 기괴하게 생긴 석수와 석수 아래에 묘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 묘지석을 판독하던 사람들은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명문에 놀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