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상한지공예로 만들어진 여인상, 쑤저우 박물관
허영진
남초 현상(한 반에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 보다 몇 명씩 더 많은 현상)이 보이기 시작해서 남자가 더 많던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남중, 남고, 그리고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과를 졸업한 탓에 사회가 얼마나 남성 위주로 성 역할이나 관계를 설정해왔는지 몰랐던 것 같아.
그러고 보니, 너희를 키워보기 전까지는 새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조차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 최근에 줄줄이 폭로되는 과거의 성추행, 성폭행에 연루된 사람들을 보면 정말 놀라게 되는데, 과연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에 연루되어 있을까?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서적인 것들까지 포함해서 본다면 아빠 역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니 또 다른 면이 보였어. 한국에서의 미투는 요즘 화두가 되고 있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었어. 하지만 이제서야 미디어를 타고 증폭되는 과정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서지현이라는 검사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이 당했던 8년 전의 성추행에 대해서 폭로했단다. 그 이후에 언론들은 미투를 앞다투어 다루기 시작했고, 유명한 연극 연출가 이윤택씨나 배우 조민기 그리고 한 때는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까지 했던 안희정 충남도지사까지 줄줄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찾아 오게 되었지.
그런데, 이 장면에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어. 바로 <내부자들>이라는 영화였어. 영화 속에서 조직폭력배는 증거를 찾아서 정계, 재계, 언론계가 결합된 스캔들을 폭로하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조직폭력배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믿지 않아.
결국 현직 검사가 같은 사실을 폭로하게 되자 사람들은 주목하고, 그 스캔들은 세상을 흔들게 되지. 같은 스캔들을 말하는 그의 직업을 언론들은 묻지. '당신은 누구냐고' 그러자 그 배우는 말하지. '대한민국 검사라고'. 이미 폭로되었던 사건들이 다시 수면에 올라오면서 영화에서는 반전이 일어나게 되지.
영화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면 그동안 사회적으로 주목도가 낮은 사람들이 이미 억울하다고, 성추행, 성폭력을 당했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가 지금 다시 재조명되고 있단다. 그렇다면 언론의 주목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일들은 얼마나 많이 무시당하고 묻혀있을까? 하는 점이야.
평범한 아니 그나마 약한 인지도가 있는 인물들이 고발한 것은 주목받지 못하고, 현직 검사가 텔레비전에 실명으로 인터뷰를 하고 나서야 세상이 움직이는 무정함에 놀라게 되는 거지. 영화보다 어찌보면 더 영화같은 현실이 2018년에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걸 바라보며 씁쓸해지기도 하고, 여러 생각을 하게 되는구나.
기초적인 상식이 지켜져야 하는 세상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어. 산업재해가 발생하여 사상자가 1명 나오면 그 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되면서 발견하게 된 법칙이지. 큰 사고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방치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 핵심이 되는 이야기인데, 이 성폭력에도 적용해본다면 분명 드러나지 않은 일들은 더 많을 거야.
발생한 모든 사건에서 사회적으로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그런 성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거부하기 힘든 상대를 고르고, 그들을 상대로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회 곳곳에 얼마나 더 많은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지.
이번 일은 남녀의 경계를 가르거나, 남자를 통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상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서 생긴 문제인 것이지. 상대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야.
<호모 데우스>라는 책에서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하지. '살인이 나쁜 이유는 피해자의 가족, 친구들에게 끔찍한 아픔을 남기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으로 성폭력은 본인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아픔과 분노를 남기게 되지.
누군가는 이것을 성간의 대결처럼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하려고도 하지만, 이건 대부분의 남자에게도 필요한 변화라는 생각을 한단다. 왜냐하면 남자에게도 가족은 있기 마련이고, 어머니 없이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 구성원 중에 여자는 있을 수밖에 없지. 만약 그의 가족이 그런 상처를 입은 기억을 가지고 산다는 걸 알게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