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범영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6쪽짜리 청년운동론 ‘민청련은 청년 대중단체로의 전환을 절대적으로 요구 받고 있습니다’ 문건 첫 페이지. (가운데)대의원총회 준비특위에서 제작한 5쪽짜리 ‘대의원총회준비 보고서’ 첫 페이지. (오른쪽) 9차총회 보고서 표지
민청련동지회
6월항쟁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대의원총회에서 민청련은 87년 상반기 활동을 평가하면서 성과로서는 "7총 이후 운영위 중심으로 공개영역이 회복되어 상하층 연대선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점, [민중신문]의 정기적인 발행, 6월항쟁 가투투쟁에서 소정의 인원동원과 가두선전활동을 수행한 점" 등을 들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중앙집행위가 좌우 편향 없이 회원지도를 잘 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어서 반성해야 할 내용으로 "조직 내 사상적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부족했다. 대중노선의 구체적 관철과 대중과의 결합방법 제시가 미흡했다, 정회원 체제가 부실하게 운영됐다, 중간지도력이 부재했다, 재정구조가 취약해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과 측면보다 반성 측면을 더 강조했는데, 특히 지도부의 사상적 지도 부족에 대한 비판은 당시 운동 세력에 불어 닥치기 시작한 이른바 'NL(민족해방)' 계열에 대한 대응을 지적한 것이었다.
정회원체제가 부실화된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많았다. 정회원제는 7총 이후 도입된 것으로 조직에 대한 높은 헌신성과 활동력이 검증된 기간활동가로 구성되는 조직 내의 비공개조직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비합법 활동 시대를 맞은 민청련이 조직 보위를 위해 자구책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반회원들에게는 누가 정회원인지 뿐만 아니라 정회원제 존재 자체조차 일체 알 수 없도록 엄격한 보안을 유지했다. 이 제도는 한편으로 민청련이 투철한 기간활동가를 양성하여 조직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서 이 정회원제를 통해 언젠가 도래할 변혁의 시기에 민청련이 지도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이 정회원 제도는 일반 회원들에게도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고, 정회원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규율이나 책임성도 확보되지 못하고 평범한 대중적 체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오히려 일반 회원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고 자발적 참여를 막는 질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대의원총회 준비특위는 이 점을 신랄하게 지적하면서 정회원체제는 해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준비특위에서 제출한 이 안건은 대의원총회에서 통과되어 정회원제는 해소됐다.
이어서 대의원총회 결의로 중앙집행위원장 겸 운영위원장이었던 권형택을 중심으로 9차총회를 준비하기 위한 총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공개 집행부 쪽에서는 사업부장 김성환과 청년부장이면서 국민운동본부에 실무간사로 파견됐던 최성웅이 참여했고, 비공개 집행부 쪽에서는 선전부장 유기홍, 조직부장 진영효, 그리고 여성 대표로 임태숙 등이 참여했다.
총회준비위원들은 대의원총회 보고서를 기초로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8차총회 이후의 사업평가, 향후 활동방향, 집행부 인선, 총회 실무준비 등의 작업을 진행했다.
김병곤이냐, 김희택이냐9차총회의 가장 큰 주제는 공개 지도력의 회복과 청년대중운동으로의 전환 모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공개지도력 회복 문제가 일단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공개지도력 회복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의장단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중에서도 의장을 누가 맡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김근태 전 의장은 아직 감옥에 있었으나 그 외에 초창기 민청련을 이끌었던 지도적 인사들은 대부분 활동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일찍이 민통련으로 간 장영달, 이해찬은 일단 논외로 하면 의장 후보로는 최민화, 김희택,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이범영 등을 꼽을 수 있었다.
최민화가 그 중 가장 연장이고 선배격이어서 의장후보 1순위였지만 부인 박혜숙의 투병 때문에 가정과 사업을 떠날 수 없었다. 박우섭은 석방 이후 활동무대를 민통련으로 정하고 활동하고 있었다. 이범영은 아직 수배가 풀리지 않아 도피생활을 계속하고 있었고, 장준영은 수배상태인지 아닌지가 좀 애매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상태였다.
결국 의장 후보는 김희택과 김병곤으로 압축됐다. 김희택은 김병곤을 의장으로 강력히 추천했다. 후배지만 김병곤의 탁월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공개운동과 노동현장을 두루 망라하는 폭넓은 인맥과 동료 선후배들에게서 받는 높은 신뢰도 그가 의장을 맡아야 하는 이유였다. 김희택이 내심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김병곤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의장의 대외교섭력에 있어서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김희택과 김병곤은 철산동 아파트에서 몇 년간 위아래 동에서 살아서 가족끼리도 자주 왕래하며 선후배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온 터라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김희택의 추천이 겸양의 말이 아니고, 진심임을 김병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병곤은 그 추천을 수락할 수 없었다. 김희택의 추천을 정중하지만 완강하게 고사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김희택을 의장으로 밀었다. 도리상 선배를 제치고 의장을 맡을 수 없다는 것도 이유였지만 김희택의 인화력과 인품을 민청련 의장에 꼭 필요한 덕목으로 생각했다.
한편으로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김병곤은 6월항쟁으로 열린 공간에서 민통련을 민중운동연합으로 발전시키고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은 그것을 위해 민통련에서 일해야 한다는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총준위원장을 맡아 인선작업을 진행하던 권형택이 두 사람을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에서 만나게 했다. 두 사람은 누가 의장을 맡을 것인가 문제로 밤이 깊도록 토론했다. 몇 시간을 서로 밀고 당기는 입씨름 끝에 결국 김희택이 물러섰다. 김병곤의 간곡한 권고를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관건이었던 의장은 사실상 김희택으로 결정됐다. 이후 총준위원회는 김희택과 의논하여 부의장으로 김병곤, 박우섭, 장준영, 그리고 총준위원장을 맡았던 권형택 등 4인을 내정했다. 그 중에서 장준영은 수배문제가 아직 애매한 상태여서 일단 비공개로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