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비안면 동부동 목단봉 기슭에 세워져 있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탑'의 모습. 경상북도 도내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이라는 뜻이다.
정만진
'치안 방해죄'로 감옥에 들어간 청년들미대동 청년들은 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나 시장에서 궐기하지 않고 산에 올랐을까? 이에 대해서는 경상북도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발원지인 의성군 비안면의 사례를 돌이켜 볼만하다.
비안면의 동부동과 서부동은 1919년 3·1운동 당시 경북 전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펼친 지역이다. 이 마을 뒷산 목단봉에는 '기미 3·1독립운동 경상북도 시발지(始發地) 기념탑'이 굳건히 세워져 있다. 또 '3·1 독립 운동 기념탑', '순의사 두곡 박공 유허비', '순국지사 현호 박석홍 기념비', '3·1 독립투사 기념비', '임란 의병장 백계 김희공 충의비' 등도 건립되어 있다.
현지 안내판은 '기미 3·1독립만세 비안 운동사'라는 제목 아래에 '1895년 8월 20일 황후(皇后) 시해(弑害) / 1896년 1월 1일 단발령(斷髮令) / 1905년 11월 을사늑약(勒約) /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주권을 상실한 식민지로 전락'으로 '2천만 민중의 통분과 격노로 항일 투쟁에 봉기 항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우리 고장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수많은 학생들과 주민들이 앞장서 일어나게 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비안 쌍계교회 조사 김원휘, 3·1만세운동을 독려3월 3일 비안 쌍계교회에서 목사를 도와 전도하는 역할을 하던 조사 김원휘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러 가는 길에 서울에서 3·1독립 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다. 김원휘는 3월 7일 쌍계리의 박영화, 박영달, 박영신, 배중엽, 배달근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감격스러운 소식을 전하면서 의거를 일으킬 것을 권유한다.
3월 12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50여 명은 등교하자 마자 마을 뒤 목단봉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 정오에는 교회 신도들과 학생, 주민 등 20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마을을 누비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가 다시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른다.
비안 사람들도 마을 뒷산 목단봉에서 만세운동 궐기학생 시위의 주동자 우희원, 박기근, 정인성은 현장에서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징역 8월∼6월의 실형을 언도받아 투옥된다. 박만녕은 탈출했다가 뒤에 검거되어 3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일반 주민들도 박영화 징역 2년, 김원휘 징역 1년 6월, 박영신, 배중엽, 박영달, 배달근 각 징역 1년, 이일만, 김명출, 배도근, 박인욱, 박세길, 배용석, 배용도 각 징역 6월, 서금이, 박충식, 최점문, 배용운 각 태형 90대 등 모두 18명이 처벌을 받는다. (자세한 내용은 관련 기사 "책보 들고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 부르자"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