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면 원곡리 우익집안 학살 장소
박만순
엄정면 유봉리 수풍말에 살던 김흥태의 눈은 광기로 빛나고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에 의해 북한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들은 김흥태는 급하게 짐을 쌌다. 이어서 평소에 악감정을 가졌던 이들의 가족을 찾았다. 평소 같은 마을에서 사사건건 대립을 일삼았던 이호이(6.25 당시 32세)는 피난 가고 없었다. 결국, 김흥태는 이호이의 부·모와 처를 무치고개로 끌고 가 처형했다. 마찬가지로 김동운 처도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유봉리 싸리재에서는 마을 좌익 패들이 우익 가족들을 새끼로 굴비 엮듯이 묶었다. 노인과 여성, 젊은이들을 모두 뒷결박 지어 무치고개로 끌고 갔다. 무치고개에서 우익가족에 대한 처형의 진두지휘는 북한군 패잔병들이 하고 김흥태를 비롯한 좌익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무치고개에서 북한군 장교는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반동들을 인민으로 이름으로 처단한다"라고 하면서 따발총을 갈겨 댔다. 그런데 총을 뒷줄부터 쏘면서 일일이 확인사살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맨 앞줄에 있던 윤도선, 최건병, 임근용, 이태희 처 등 5~6명이 살아났다. 뒷줄에 있던 유영배, 이상구, 윤상호, 이승옥, 안다영 등 20명이 죽었다.
김흥태를 비롯한 지방 좌익들은 처형당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처형 이유를 밝혔다. 이경희(80세. 엄정면 유봉리) "너는 오빠가 경찰이라 죽인다"며 이○○을 처형했다고 한다. 이○○은 충주경찰서 사찰주임 이명희 여동생으로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 무치고개에서 죽은 유봉리 싸리재 마을 20명 중 여성은 10명이나 되었다. 결국, 무치고개에서 유봉리 주민 30명이 북한군 및 지방좌익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 학살현장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김흥태는 전쟁 전부터 남로당 활동에 주도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같은 마을 이호이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이호이는 김흥태를 엄정지서에 고발했고, 김흥태는 지서에 끌려 가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그러던 차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김흥태는 평소에 악감정을 가졌던 이호이를 복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호이는 전쟁과 동시에 피난을 했고, 김흥태는 이호이의 가족을 포함해, 우익가족들을 대살(代殺)한 것이다.
좌익과 우익에 의한 학살, 닮은 꼴
엄정면에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전국 어느 곳이든 그렇지 않은 곳은 없었지만, 특히나 엄정면은 심했다.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한 피해자는 10명 미만이었던 반면, 부역혐의자 사건과 관련한 피해자는 수백 명에 이른다.
유봉리의 경우 공재석(78세. 엄정면 유봉리)은 "부역자로 죽은 사람이 수 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는 정확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빨갱이들이 유봉리에서 죽인 숫자는 30여 명인데, 경찰들이 죽인 반대편 사람들은 훨씬 많다"고 한다. 부역자 가족들이 우익 가족에 비해 몇 배의 피해자가 발생한 것은 모든 증언자에게서 공히 나오는 말이다.
<엄정면지>에 의하면 한국전쟁기에 유봉리 가구 수는 140호였다. 그런데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피해자가 18명이라고 적시되어 있다. 위 피해자를 포함해 105명의 인구감소가 있었다고 한다. 이 통계에 자연사(自然死)가 포함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좌·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다수를 이루었음은 분명하다.
즉, 위 통계를 그대로 믿는다면, 북한군과 좌익에 의한 피해자가 18명~30명이고, 나머지 75명~87명이 경찰과 우익에 의한 피해자다. 여기서 기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히 숫자의 다소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학살방법과 대상, 그리고 가해자 및 집단의 성격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엄정면에서의 민간인학살사건은 좌익에 의한 것이든 우익에 의한 것이든 너무나 닮은꼴이다. 대살이라는 것도 그렇고, 잔인하게 죽인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좌에 의한 학살이 18세 처녀부터 노인까지였다면, 우익에 의한 학살은 간난아이부터 노인까지였다는 점이다. 즉 우익에 의한 학살이 훨씬 참혹했다는 점이다.
또한, 우익에 의한 학살을 엄정지서 경찰이 주도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국군수복기의 무정부주의적 상황이라 하더라도 일반 민간인이 부역 혐의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참혹한 일에 경찰이 강력히 개입하지 않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엄정면 유봉리 수풍말 출신 민정수가 지서장도 아닌 순경으로서 이 일을 주도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민정수가 엄정면 '피의 제전'을 주도한 것만큼은 다수의 증언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정수가 전쟁 후 엄정지서장과 목계지서장, 그리고 단양군 매포지서장을 역임했다. 그런데 엄정지서 뿐만 아니라 목계지서에서의 그의 잔인한 성격과 행동이 주민들의 다대한 원성을 샀다고 한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
그의 전쟁기간에 했던 행위가 단순히 일탈행위로 보아야 할지, 사이코패스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단순히 그의 개인적인 성격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된다.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통제하지 못한 엄정지서와 충주경찰서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런 모든 문제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북한군과 지방좌익의 책임 또한 적지 않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는 말이 있는데, 엄정면의 상황이 이 말에 딱 맞는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반인권적인 전쟁범죄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68년이 지난 일이지만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려 역사와 인권의 나침판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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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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