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외수 선생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철관
"오죽했으면 군수에게 막말을 했겠나. 술을 먹었기에 참다못해 막말을 했다. 당시 언론들이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보도했고, 술과 막말만 부각시킨 측면이 있다. 언론이 제 입장에 대해 소원했다. 인권신문 등 나를 이해해 준 기사도 일부 있었지만, 객관적인 뉴스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난해 8월 6일 강원도 화천군 감성마을 문화축전 시상식에서 소설가인 이외수씨가 최문순 화천군수에게 막말을 해 군수, 군의원 등 지역사회와의 갈등을 빚어온 지 7개월이 지났다. 최근 만난 이외수씨는 당시 사건의 발단이 무엇인지, 전후 사정이 무엇인지가 무시됐고 화천군수, 군의원 등에 의한 일방적 여론으로 뭇매를 맞았다고 토로했다. 특히 그 선두에는 화천군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이 서 있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지난 17일 오후 1시 강원도 화천군 감성마을 이외수 문학관 접견실에서 한국인터넷기자협회 주최로 이외수씨와 단독 인터뷰를 했다. 그의 근황과 건강, 화천군과의 갈등, 미투(Me too)운동, 평창올림픽, 남북화해 등의 주제 놓고 1시간여 대화를 나눴다.
먼저 인터뷰 전날인 16일, 평창 장애인 올림픽인 패럴림픽에 가 문학 분야에 멘토로 나서 지도를 했던 일들을 자연스레 얘기했다.
"지난 16일 평창 패럴림픽에 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영화감독이 제작한 영상과 함께 어우러진 문학 멘토를 멋지게 해냈다. 대중음악, 무용 등 모든 분야에서 참여한 멘토들이 사명감과 희생정신을 갖고 임했다. 자신들의 권위나 욕심을 다 버리고 그야말로 봉사하는 기분으로 하니, 진실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더라. 다들 감동적이었다. 나는 문학과 영상이 어우러진 콜라보로 문학지원 멘토로 나섰다. 이곳에 온 20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영상을 보고, 시를 쓰게 했는데 엄청 헤매더라. 처음에는 뭔가 잘될 것 같지 않아 힘들었다. 그래서 작품 몇 개 보여주고 어떻게 하는지, 빨리 급조하는 방식을 가르쳐 줬더니 그것을 용케 해냈다. '20대가 참 좋기는 좋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문학 멘토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참여한 사람들이 다 기적이 일어났다고 했다. 아쉬운 것은 무용 등 다른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멘토로 참여했는데, 문학인들은 잘나서인지 참여가 저조해 조금 아쉬웠다."과거 소설을 쓸 때 수면시간이 아주 짧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 비법이 있었다. 잠깐을 자도 꿈을 꾸지 않고 깊게 자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이었다.
"거의 돌아버릴 지경까지 졸리는 것을 버티다 자야 한다. 한 시간만 자고 반드시 일어나겠다는 자기최면을 걸면, 정확하게 한 시간 만에 일어난다. 그러면 아주 개운하다. 사람의 의식이라는 게 그런 걸 보면 엄청 놀라운 일이다. 딱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겠다고 자기체면을 계속 걸어 놓으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일어나게 돼 있다. 누구든지 극한 상황이나 절체절명의 상황, 내 인생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다들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8월 화천군수와의 막말 시비로 지금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타협점은 없는 것일까. 그의 입장을 들어봤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양보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참고 극복해 가야하는데 양보해서 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서 무슨 욕구도 없다. 선거 출마할 의사도 없고 문학관도 잘 운영되고 있다. 특히 '이외수 문학관'의 영향을 받아 전국 거의 140여 개 문학관이 새로 신설되거나 주목하고 있다. 벤치마킹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특정세력이 뭔가의 정치적 욕심을 가지고 왜곡·확대 재생산해 '이외수 흠집 내기'를 계속하고 있다. 전국에서 몰려온 산천어축제 직전에 아무 근거 없이 나를 비난하는 플래카드 80개를 걸었다. 내용 자체도 온 국민을 속였다. 진실과 거리가 멀고 허위·날조했다. 그것도 산천어 축제 직전에 대한민국 전역에서 몰려오는 모든 사람들한테 '이외수 물러가라'고 하는 이런 정치인들이라고 하면 솔직히 군민 손으로 뽑았다는 것도 개망신이지만, 나라 말아먹자는 뜻이 아니겠는가. 너무 억울하다." 그는 정갑철 전 화천군수가 이곳으로 데리고 올 때 이곳 정치인, 군민들 할 것 없이 다 좋아했다고도 했다.
"당시 내가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조중동을 비롯, 지역 언론까지 다 긍정적인 글을 썼다. 감성마을의 경제적 효과 등을 말했다. 마을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것이라고도 했다. 구제역으로 산천어축제가 취소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서울시장을 만나 서울시청 광장 앞에 부스를 설치하고 화천에서 나온 농산물을 팔았다. 또 은평구청장에게 얘기해 우리 화천에 있는 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게 해 수천만 원의 산천어를 팔았다. 그렇게해서 산천어축제를 못해 손해난 상당수 금액을 만회했다. 그랬는데 이런 과거는 다 지워버리고 이제 나에게 욕을 한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다 지워버린 것 같다. 이곳 이장이 나를 두고 '밥 한 그릇도 팔아주지 않았다'라고 날조해 군의회까지 가서 얘기를 했다고 들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닌가." 일부에서 화천 감성마을을 떠나 춘천이나 전남 함평으로 내려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물어봤다.
"낭설이다. 나는 누가 가라고 해서 가고, 있으라고 하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집필실은 글에 맞는 장소를 선택해 정하겠지만 지금 입장으로는 화천에서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떠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적어도 화천을 배경으로 작품을 오래 전부터 써왔는데 솔직히 화천군민 중에서 특히 군의원 중에서 내 작품 제목이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