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릉경주 무열왕릉, 비석을 통해 피장자가 확인된 경우로 신라왕릉 연구에 있어 기준점이 되고 있다.
김희태
하지만 당시 성골의 신분은 덕만 공주와 승만 공주가 유일했기 때문에, 성골의 혈통은 진덕여왕을 끝으로 끊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무열왕은 김유신과 손을 잡고,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무열왕과 김유신의 관계는 단순히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라 평생의 동지라는 표현이 정확한데, 둘 사이는 혈연적으로도 이어졌다.
무열왕의 가족사는 곧 신라의 역사와 다를 바 없는데,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문명왕후(문희)로, 김유신의 지원을 등에 업은 무열왕은 새로운 권력과 권위를 창출했다. 무열왕은 문명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인 김법민(=문무왕)과 김인문을 낳았는데, 이 두 사람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642년 8월, 신라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야성이 함락되면서, 무열왕의 사위인 품석과 딸인 고타소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에 무열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갖고, 백제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와 '왜'와의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는 고구려의 입장을 거부하면서, 투옥 당하는 시련을 맞이하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선택지인 당나라로 이동해 당 태종과의 협상 끝에 서로 손을 잡는데 합의하게 된다. 이는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인데 당은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있어 신라를 배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과 신라로서는 백제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당 군사동맹으로 발전되어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