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평왕릉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의 능, 진평왕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하는데 있어 그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김희태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은 바로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평왕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천명 공주와 덕만 공주(=선덕여왕)였다. 여담이지만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진평왕의 딸로 선화공주의 존재가 나타나는데, 정사인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고 있다.
또한 선덕여왕은 후대에 붙인 이름일 뿐 기록에는 선덕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신라에 두 명의 선덕왕이 있는데, 선덕여왕 이외에 또 한 명의 선덕왕(宣德王, 재위 780~785)은 혜공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김양상이다.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신라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이 오를 수 있었는데, 성골의 경우 성골과 성골 사이에서 태어날 때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당시 성골의 신분은 덕만 공주와 함께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 승만 공주(=진덕여왕)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선덕여왕의 치세는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외적으로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에 대한 파상적인 공세를 시작하며 '마두성(馬頭城)'을 포함한 40여 개의 성이 공취했다. 또한 이전까지 앙숙이었던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의 원한을 잊고, 신라를 타도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신라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내부적으로 647년 '비담의 난'이 일어나는데, 비담이 난을 일으킨 명분이 '여자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의미의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였다. 여기에 당나라 역시 여자가 왕을 하니 안 된다는 식의 핀잔을 던진 사실에서 당시 선덕여왕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맞이한 선덕여왕의 치세지만, 신라 문화의 꽃을 피운 시기라는 점은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