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임 교사 시절, 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과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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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담장 밖의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교사가 되어 학교로 돌아왔을 때 담장 안은 낯설지가 않아서 되려 놀랐다. 펜치가 봉걸레 대나 회초리로, 전체 조회에서 가슴팍을 걷어차던 발길질이 교무실이나 복도에서의 폭력들로 약간의 변신을 했을 뿐이었다.
학교가 '인정사정 볼 것 없는 곳'처럼 무서웠다. 타 도시에서 학교를 전전하다 전학 온 일진 학생을 신입 교사인 나의 반에 배치시켰다. 매일 3~4명의 학생이 상습적으로 지각이나 결석을 해대는 반, 부모의 돈을 훔쳐 가출하는 아이가 있는 반, 쉬는 시간마다 흡연하다 발각된 아이들이 담임 자리에 와서 대기를 하고 있는 반인데도 한 명을 더 얹었다.
교사에게 최고로 할당할 수 있는 주당 24시간의 수업을 하고(그 당시엔 신입 교사에게 가장 많은 수업 시수를 몰아주고, 가장 기피 업무를 주는 것이 학교의 관습이었음), 공강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는 학부모에게 전화를 하고 학생들을 불러 상담을 해야 했다.
선배 교사들이 조언했다. 매일 교사 수첩에 말썽 피는 아이들의 상담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으나, 나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니 그렇게 따랐다. 점심을 놓치는 경우도 많았고, 너무 지쳐서 밥도 넘어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변명이 될 수 없지만,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익숙하고 쉬운 방법은 회초리를 드는 것이었다. 비열하게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는 말들을 쏟아냈다.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네가 말을 안 들으니 때리는 거야.)"날 무시하는 거야?" (네가 교사를 무시하니 맞아도 싸.)맞던 자가 때리는 자가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했다. 양심을 속일 수는 없으니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위안이 필요했다. 나는 나쁜 길에 빠진 아이를 구원하고 있는 거라고, 그게 교사의 본분이라고.
'내가 이 일을 평생 할 수 있을까?'좁은 원룸 방에서 혼자 벽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과 가슴이 터질 듯 답답했다. 축 절여진 파김치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사표(그때는 퇴직이라는 단어도 몰랐다)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면, 미래가 불안해서 더 잠을 이룰 수 없는 악몽의 날들이 이어졌다.
외부에선 교사들에게 불신의 시선으로 '맘에 안 들면 때려 치우던지', '공무원 철밥통'이라 야유를 보내지만 직장이 맘에 안 든다고 밥그릇을 걷어찰 처지가 아니었다. 대학 때부터 내 밥그릇을 스스로 책임지던 나는 떠나지도 못하면서 차츰 폭력에 둔감한 교사가 되어갔다.
맞고 때리는 일에도 '익숙함', '면역력'이란 단어가 적용된다는 게 씁쓸했다.
*다음 기사 : 어느날 사라진 학생, 교사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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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멍 들도록 맞아봤는데... '폭력교사'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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