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 성.프랑스 왕의 역사에서 유폐와 도주, 그리고 파괴가 연속되었던 역사적인 성이다.
노시경
투르 성은 현재 많이 파괴되어 긴 장방형의 본성만 남아 있는 모습이다. 원래는 본성 건물의 네 모서리마다 네 개의 원형 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건물의 남북에 두 개의 탑만이 남아 있다. 그 중 북쪽에 있는 더 뚱뚱한 탑은 '기즈(Guise)의 탑'이라고 불린다. 16세기에 이 탑 안에 프랑스 왕의 정적이었던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가 잡혀 와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앙리 3세(Henry Ⅲ, 재위 1574년~1589년)는 왕권을 위협할 여지가 있는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 투르 성의 시설들을 이용했다. 앙리 3세는 종교전쟁 당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앙리 드 기즈(Henri de Guise)를 그의 집무실에서 제거했다.
집권 초기의 앙리 3세는 가톨릭 측에 합류하여 개신교도들을 억압하는 전쟁을 벌였었다. 하지만 종교전쟁이 끝나갈 무렵 앙리 3세는 독자적인 세력으로서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갔고, 개신교도들에게도 이득을 보장해 주었다. 이에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앙리 3세를 공격하기 시작한 가톨릭 측 중심인물이 바로 앙리 드 기즈 공작이었다.
당시 앙리 3세의 부하들은 앙리 드 기즈의 등을 다섯 개의 단검으로 찔러 암살했다고 한다. 앙리 3세는 후환을 없애고자 그의 아들 샤를 드 기즈(Charles de Guise) 등 기즈 가문 일가를 투르 성의 이 탑에 가두었다고 한다.
회색빛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기즈 탑은 높이가 25m에 달할 정도로 높다. 이 기즈 탑의 중앙을 유심히 보면 원형의 공안(空眼)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폐쇄된 공간에서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활을 쏘거나 돌을 아래로 떨어뜨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시설이다. 탑의 맨 위에도 숨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원형의 돌출회랑이 있다. 이 돌출회랑은 내부에서는 위 아래가 통하도록 뚫려 있고 사방을 향하도록 삥 둘러져 있다.
기즈 탑을 쌓은 장방형 석재들은 시대를 거듭하며 보수된 흔적이 마치 한양성곽의 시대별 축성양식을 보는 것 같이 흥미롭다. 탑의 하단부는 마치 자갈을 쌓은 것 같이 작은 석재들이 혼재되어 있고, 중앙부와 상단의 석재는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곳곳에 반듯한 새 석재가 끼워져 있다. 비슷한 크기의 석재들도 흰색, 회색, 노란 색 등 지난 오랜 세월을 표현하고 있다.
이 탑 안에 갇혀 있었던 젊은 샤를 드 기즈는 어떻게 되었을까? 1591년 그는 투르 성의 경비병들을 속이고 기즈 탑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앙리 3세에 대적해달라는 가톨릭 진영의 기대에 부합하지는 못하였다. 그가 투르 성을 탈출한 후 앙리 3세를 제거했으면 드라마틱한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될 터인데 이미 가문이 몰락한 그는 내전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16세기 이후 투르 인근 루아르 계곡 상류 쪽에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의 성들이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 성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애정은 점차 줄어들었다. 한동안 방치되던 투르 성은 17~18세기에는 지방 관리들의 저택이나 군대 주둔지 심지어 교도소 등으로 사용되었고, 당시 성의 건물 일부가 해체되고 성의 석재가 루아르 강의 제방을 쌓는 데 쓰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속절없이 훼손된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1671년 당시의 투르 성 조감도를 보면 큰 사다리꼴 모양의 성벽 안에 북서방향으로 치우친 작은 사다리꼴 모양의 성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현재의 투르 성은 성을 둘러싸던 성벽과 해자를 연결하던 다리 등 많은 구조물들이 사라졌으나, 성 중심 건물의 기본 배치는 당시 모습대로 남아 있다.
투르 성은 프랑스 중세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13년과 1973년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 역사기념물로 등재되었다. 현재 투르 성의 공간은 프랑스 국립 고고학 센터와 현대미술 갤러리의 기획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의 벽 전면에는 전시 중인 사진기획전을 알리는 거대한 걸개그림이 투르 시민들을 부르고 있었다.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이지만 현재도 투르 시민들이 즐겨 찾는 살아있는 문화공간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