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번주가 위조한 직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김문길 교수가 흥미로운 자료를 보내왔다. 일본과 조선 양국 사이에 끼어 입장이 난처해진 대마도 번주가 양국의 문서를 위조했다는 것.
임진왜란이 끝나고 세끼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에도막부를 세우고 대마도 번주 '소 요시도시'에게 명령했다. "조선국왕도 참석해 축하하라!"
명령을 받은 대마도 번주는 몸둘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전쟁포로로 데려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왕비 묘를 도굴한 범인을 잡아 보내라는 독촉도 있었는데 축하사절단을 보내라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조선을 따르자니 막부에게 목이 잘리겠고, 막부를 따르면 조선과 교류를 못해 경제가 어려워질 것을 고민하던 대마도 번주는 꾀를 냈다.
그는 가신 '야나카와 도시나가'와 의논 끝에 국서를 위조하기로 했다. 조선국왕에게 보내는 문서에는 임진왜란 때 잡혀온 포로를 송환한다는 의미로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명칭을 정한 후 직인도 이정이덕(以政以德)으로 위조해 조선에 보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조선통신사' 이름으로 조선국왕의 문서를 위조해 보냈다. 봉서는 먼저 화해를 청하는 말이고, 봉복은 회답을 뜻한다. 번주가 일본조정에 보낸 <조선국왕봉서(朝鮮國王奉書)>는 조선이 먼저 화해하자는 의미로 위조해 보낸 것이다. 종이도 일본에는 없는 종이로 제작했다.
국서위조를 몰랐던 조선조정에서는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고, 일본막부는 조선사절단을 축하객으로 맞이했다. 1635년 도쿠카와 이에미츠 막부 시절, 대마도 번주 소 요시나리와 그의 가신 야나카와 시케오끼 간에 커다란 소동이 일어나자 야나카와가 막부에 위조사건을 고발해 두 사람은 징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