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에 갔던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 세 식구는 지레 뿔뿔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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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12시, 아빠가 없는 거실에 식구들이 옹기종기 모여든다. 엄마가 끓여준 국수를 호로록 먹으며 TV를 본다. 밥상을 치우고 나면 오빠와 나는 비스듬하게 누워서 '출발 비디오 여행'을 마저 시청하며 살짝 잠이 들곤 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해가 지면 불안해졌다. 경마장에 갔던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 무렵, 우리 세 식구는 지레 뿔뿔이 흩어졌다. 열 번 중 아홉 번은 지는 도박판에서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돌아올지는 안 봐도 뻔했다. 어떤 포인트에서 화를 낼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빠는 나를 가장 사랑했고, 나를 가장 빈번하게 때렸다. 이유가 없어도 맞았고 이유가 있으면 더 심하게 맞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물을 엎지른다고 맞았고, 발소리가 크다고 맞았다. 말대꾸한다고 밥상에서 싸대기를 맞기도 하고, 아예 밥상을 엎기도 했다.
학교를 땡땡이쳤던 어느 날, 담임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아빠는 나를 구석에 몰아넣고 10분쯤 발로 밟았다. 오빠는 한번 맞으면 심하게 맞았다. 중학생이 되자 자기 방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대학에 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취를 시작했다.
엄마는 돈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아빠는 주식과 경마를 오가며 가산을 탕진해갔다. 엄마는 마지막 남은 전세금을 움켜쥐고 위태롭게 버텼다. 그러자 그는 저녁마다 돈 내놓으라며 몇 시간이고 어르고 달래고 협박하며 잠을 못 자게 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엄마는 바싹 말라가고, 아빠는 독이 바짝 올랐다. 그는 새벽 기도를 하려 나서던 엄마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리 지르며 손을 올리던 아빠의 팔목을 낚아챈 것은 오빠였다.
"이제 그만 하이소." 오래 벼른 말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 세 식구는 아빠가 잠든 틈을 타 집을 나왔다. 새벽의 일이 분했던지 그는 초저녁부터 아들과 다시 몸싸움을 벌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경찰이 들렀다가 갔다. 표면적으로는 소강상태였지만, 어둠 속에 살기가 깔려 있었다.
20년간 공고하게 유지된 가부장의 권력에 금이 갔다. 그간의 행적으로 미뤄볼 때 칼부림을 하든 방화를 하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어 보였다. 우리는 살기 위해 짐을 쌌다. 3개월 뒤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빠가 찾아올까 두려워 숨어살았다. 단칸방이지만 그가 없는 집에서 난생처음 안락함을 느꼈다.
헤어질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은 독재자들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난 지금, 부친이 도박 중독이었던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가정폭력만으로는 이혼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을 가정폭력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아빠가 성질이 더럽다고만 여겼지, 가정폭력의 가해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쩌다 한 번, 횟수로 따지자면 반년에 한 번쯤 맞았을까?
피가 난다거나 멍이 든다거나 외상이 남는 경우도 드물었다. 그건 내가 알던 가정폭력과 달랐다. TV에 나오는 사건처럼 피투성이가 되도록 심하게, 2~3일이나 일주일 간격으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빠는 나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우리는 나름대로 함께 사는 법을 익혀왔다. 간헐적인 구타는 아빠의 말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집 안에서 그는 왕이고, 그의 기분이 곧 법이었다. 그 법을 따르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자산인 전세금을 내놓으라던 그 무리한 요구만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독재자가 구축한 억압적인 평화 속에서 말이다.
종종 나의 가정사를 부러워하는 이들을 만난다. 결정타가 없어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연을 끊지 못한 경우다. 그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어렸을 적 아버지는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자기도 맞고 어머니도 맞았지만 죽을 만큼 맞지는 않았고, 아버지가 경제적 책임을 다했다거나 혹은 무능력하더라도 최소한 집안 경제를 파탄에 빠트리지는 않을 정도라면, 그 시절의 부모들은 혼인관계를 유지했다. 이혼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은 독재자들 탓에 경미한 가정폭력은 밖으로 드러나지도 않았다.
내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익숙한 것은 먼저 내 경험을 털어놓고 나면 그제야 너도나도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상습적으로 구타를 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주변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험에 가정폭력이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했다.
한두 번이라서, 비정기적으로 맞아서 그랬던 걸까? 경찰이 올 정도는 아니라서? 병원 가서 진단서 끊을 정도는 아니라서? 때리고 나면 아버지가 그 다음날 잘해줬기 때문에? 술만 먹지 않으면 멀쩡한 사람이라서? 내가 맞을 짓을 했기 때문에 맞은 건 아닐까? 아버지의 말대로 어머니가 먼저 잘못한 건 아닐까? 모든 물음의 끝에는 이 한마디가 기다린다.
"그 정도는 아니라서." 집 안에서 때린 사람이 있고 맞은 사람이 있다. 이 자명한 사실을 두고, 가정폭력을 가정폭력이라고 부르기까지는 얼마나 까다로운 조건들이 필요한 걸까. 가정폭력에 관한 책<아주 친밀한 폭력>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정폭력의 존재, 실태, 구조를 아무리 완곡하게 설명해도, 다시 말해 '경미한' 사례를 예로 들어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놀라면서도 이들은 '우리 집도 그렇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경험과 인식의 격차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나의 가족사'를 주제로 해 학생들에게 리포트 숙제를 내주면, 절반 이상이 '아버지는 구타자'라고 써낸다.
이 수치는 가해자, 피해자, 조사자의 폭력 개념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가정폭력 실태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한국 여성 대부분은 평생에 한두 번 이상 배우자나 연인으로부터 폭력 피해를 경험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가정폭력(아내에 대한 폭력)의 경우, 그중 절반 이상은 '종종', 3분의 1은 반복적, 규칙적, 일상적으로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