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탈해왕릉측면에서 바라본 탈해왕릉의 모습
김희태
노파의 양육 아래 성장한 탈해를 눈여겨본 남해왕(재위 4~24)은 자신의 딸 '아효부인(阿孝夫人)'을 탈해와 결혼시키며 사위로 삼았다. 이 결혼을 통해 탈해는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이 되는데, 훗날 성씨가 다름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신라의 역사에서 성씨가 다름에도 왕위에 올랐던 경우가 제법 있는데, 예외 없이 사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권력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의 편입 유무로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셈이다.
탈해가 왕위에 오르기 전 재미있는 일화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른바 '떡과 이빨자국'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남해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이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당시 태자였던 유리왕(재위 24~57)이 덕망이 있던 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물론 탈해는 사양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서로 양보가 오가는 과정에서 합의안으로 도출된 것이 연장자가 왕위에 오르자는 것이다. 그런데 연장자를 구분하는 방법이 재미있다.
당시 떡을 깨물어 이빨 자국이 많은 사람을 연장자로 구분했는데, 유리왕의 이빨 자국이 더 많았기 때문에 유리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 신라의 왕호인 '이사금(尼師今)'이 연장자를 뜻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 있게 바라볼 일화다.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경주 계림유리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탈해가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이를 통해 당시 탈해의 기반과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왕실의 권력을 공유하는 집단에 포함이 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통해 탈해는 석씨계 최초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편 이 무렵 '계림(鷄林)'에서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