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황토현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의 구호였던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이 새겨져 있다.
권경원
1963년, 이 탑이 세워지던 날 대선을 앞두고 남부의 지지를 기반 삼으며 호남의 지지가 간절했던 유력 후보가 이 자리에 섰다. 자신의 아버지가 동학접주였다는 사실을 환기하며, 동학란이라 불리던 갑오년의 일들을 동학혁명이라 고쳐 새겼다 했다. 덕분인지 그는 대선에서 1.5%의 간발의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그로부터 2년 전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명을 몰고 한강을 건넜던 군사혁명위원장 박정희였다.
역사란 기억을 새기는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을 누락하는 기록 과정이기도 하다. 동학교도와 함께 갑오혁명의 또 다른 주체인 농민의 이름은 들어가지도 못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엉망인 나라를 고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인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덧댈 보(輔)'가 기념탑에는 '지킬 보(保)'로 바뀌어 새겨졌다는 이야기가 뒤를 따랐다.
거괴와 천녀로 불린 동학농민혁명가, 이소사당도해야 할 시대가 오지 않았던 조선 말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백성을 수탈하는 부패한 관료에 맞서 '제폭구민'의 기치를 들었던 1차 봉기와는 달리,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해 빌린 외세를 척결하고자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고 일어섰던 2차 봉기 때엔 조선의 조정이 휴전 협정을 어기고, 일본군만이 아니라 청나라까지 연합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군은 한반도의 남서쪽으로 밀려 장흥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3만이 넘는 대오를 이뤘다. 패배가 자명한 전투의 끝자락에 장흥 일대를 점령하고, 장흥부사 박헌양 등 장졸 96명을 전사케 한 장녕성에서 마지막 승리를 거둔다. 일본군 대대장 남소사랑(南小四郞)이 쓴 토벌기록인 '동학당정토약기' 중에는 이 전투에서 "부사의 목을 내친 사람이 여인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대목이 있다.
이소사라는 그녀의 이름이 최초로 발견된 것은 정부 토벌군이었던 이두황의 '우선봉일기'였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남소사랑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괴(巨魁) 체포자 이소사가 소모관에게 허벅지 살을 베이는 문초를 당해 살이 썩어 문드러지고 숨을 헐떡이는 지경에 이르러 위태하므로 나주로 호송이 불가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다음 해 나주에 있는 일본군 감옥에서 심문 직전 옥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에 관한 당시의 모든 기록은 그녀를 죽이는데 가담한 사람들에 의해 남겨졌다. 당시 일제의 신문이었던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 자에는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