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내부에서 본 처인부곡 추정지처인성 북쪽에 처인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있다.
홍윤호
고려 때는 이 처인성 뒤편에 처인부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탄에서 들어와 용인시 이동면으로 이어지는 82번 지방도로에서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는데, 예전에는 이 길가에서 처인성과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개발 때문에 눈앞이 훤해져, 지방도로에서도 처인성이 보인다.
즉, 개발되기 이전 처인성 골짜기는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한적한 산골이었다. 주변 산들이 그리 높지는 않지만 최근까지도 주요 교통로가 비껴갔던 시골 동네였다. 거의 마지막까지 남은 용인시의 산골 동네였던 셈.
그러다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처인성도 거의 방치되어 있었다. 기념비야 진작에 있었지만, 마을 풍경도 그렇고, 관리 상태도 그렇고, 홍보도 안 하고 있었던 조용하고 평범한 골짜기의 작은 토성이었을 뿐이다. 흙으로 쌓아올린 성이므로,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석성(石城)과 같은 위용도 없었으니, 기념비만 아니면 그 역사 속 승전의 현장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처인성 바로 아래에는 이곳이 처인성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처인성 승첩 기념비가 있다. 돌로 쌓은 흔적이 없는 순수한 토성으로, 양쪽으로 돌아 올라가는 길이 있다.
고도 70m 높이에 자리한 처인성은 전체가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둘레가 약 400m 정도이다. 성벽을 따라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고, 성 안쪽에도 나무들이 촘촘하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이 정도면 규모가 상당히 작은 성이다.
이곳 처인성에서 몽골의 2차 침입이 절정에 이른 1232년 12월 어느 날, 역사에 남을 전투가 벌어졌다.
여러 전쟁사가들이 지적했지만, 처인성은 정규군이 아닌, 김윤후를 중심으로 한 일부 승려와 처인부곡민들이, 총사령관이 이끄는 몽골군 본대와 정면 대결을 할 만한 입지나 규모가 아니다. 몽골군 부대가 맘먹고 공격하면 제대로 방어해낼 만한 지형적 이점이 없다.
그리고 처인부곡은 특수행정구역이다. 천민은 아니었지만, 일반 군현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았던 고장이다. 이들이 고려를 위해 목숨을 걸고 몽골군을 막아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겠지만, 객관적 상황이 워낙 열악했다.
몽골군이 이 골짜기에 들어올 만한 합리적인 이유도 애매하다. 최근까지도 한적한 시골 마을로 남아있었을 정도로 주요 교통로에 자리한 요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시대에 군창이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때 관군이 처인에 주둔한 왜군과 싸워 처인을 탈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때부터 군량미를 저장한 제법 큰 창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당시 상황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주요 교통로나 요지도 아닌 처인성 골짜기에 몽골군이 들어온 이유는 식량, 곧 군량미 때문일 것이다. 몽골군의 약탈적 속성도 이곳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겠다. 따라서 주민들이나 군대가 다수 주둔한 요지의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굳이 대규모 부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다. 골짜기나 벌판의 규모로 보면 몽골군이 대규모로 동원될 수도 없다.
만약 몽골군이 약탈할 만한 식량이 꽤 필요한 상황이었다면 총사령관이 직접 나선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실제로 이 즈음 몽골군이 인근의 경기도 광주성을 공격했다가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처인성 공격 직전의 상황이라면 식량이 상당히 필요하지 않았을까)
차라리 양쪽 정규군이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상황이라면 사령관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지휘를 했을 텐데, 별 크지도 않은 작은 성에 쌓인 군량미를 약탈하는 일이라 자신이 직접 약탈해서 먼저 차지하려 했을 수 있다. 그리고 직전 광주성 전투에서 함락에 실패했다면, 손쉬운 승리와 약탈을 통해 지휘관으로서의 체면을 세울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방심한 것이다.
이때 처인성에는 김윤후라는 승려가 -아마도 여러 명의 다른 승려들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약탈을 목적으로 덤비는 군대는 어느 정도 규율이 흩어질 수 있다. 더구나 상대의 숫자가 적고 방어 능력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먼저 차지하려고 성급하게 덤빈다. 하물며 약탈이 일상인 몽골군이야.
아마도 전투를 직접 겪지 못한 부곡민이 다수였을 처인성 방어군 입장에서 이들을 정면 상대하는 건 자멸을 초래하는 것 뿐. 그렇다고 항복하면 몽골군이 순순히 살려둘지도 알 수 없는 상황. 그저 소소한 저항 정도로 전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몽골군도 이런 식의 약탈전에서 방어군의 저항을 이미 많이 경험했을 테니 더욱 방심했을 터.
이때 승부수가 날아든다. 아마 애초에 승부가 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김윤후와 그의 동지들은 처음부터 지휘관의 목숨을 노리고 매복해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승부수는 통했다. 아니, 통한 정도가 아니라 완벽한 성공이었다! 저격의 화살이 살례탑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수많은 고려민들은 비록 2년이 못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불의의 기습으로 지휘관을 잃은 몽골군은, 총사령관이 사망할 경우 새로운 사령관을 정할 때까지 전쟁을 중단하는 자신들의 관례에 따라 이 땅에서 거짓말처럼 철수했다. 과거 칭기스 칸이 사망하자 모든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돌아와 새로운 칸을 선출한 다음 다시 전쟁을 재개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