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선정비군에 있는 도원수 권율 장군 창의비. 양옆에 친일인사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가 있다. 마치 권율 장군을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다
임영열
여러 비석들 중 맨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약 2m가량의 세 비석이 유독 눈길을 끈다. 맨 앞줄에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가 세워져 있다. 한 발짝 물러선 그 양옆으로 두 개의 비석이 권율 장군 창의비를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다. 친일인사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다.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와 '관찰사 이공근호 선정비'라고 적혀 있다. 윤웅렬이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내고 난 다음 해인 1898년에 세웠고 이근호가 5대 관찰사를 지내던 중인 1903년에 세웠다.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는 권율 장군의 11 세손 되는 권재윤 공이 1901년 신축년에 광주 군수로 부임하여 그 이듬해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와 전라감사를 거쳐 조선 최고 사령관, 도원수를 지냈던 권율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구 한말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은진 송병순이 비문을 짓고 후손 권재윤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의병을 모아 '이치 전투'에서 호남을 온전히 지켜낸 장군의 공을 치하하여 '전라도 순찰사'에 승차한다는 내용과 행주 전투 승전을 보고받고 '팔도 도원수(都元帥)'로 제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측면에는 전투에 참여한 제장 26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정충신· 김덕령· 고인후· 선거이...
'금수저' 권율,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다
권율(權慄 1537∼1599)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막내아들로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권적이 강화 부사(府使)였다. 본관은 안동이다. 유복한 집안의 전형적인 '금수저 출신'이다. 권율은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갈 생각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며 산수를 즐기고 지리 공부에 탐닉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권율은 "옛날 주나라 강태공은 현명하여도 나이 80세에 출사를 하였고 나는 아직 마흔밖에 안되었다. 재덕 또한 그에 비하면 반에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공명을 바랄 것인가" 하며 벼슬에 나가는 것을 조급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 권철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1582년(선조 1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관 출신이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위가 되는 오성대감 이항복(1556~1618)보다 2년이나 늦게 관직에 나갔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의주 목사를 지냈지만 행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된 신세였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직책이 없던 권율을 광주 목사 자리에 앉히고, 정읍 현감(종 6품)이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정 3품)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을 천거한 사람은 영의정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었다. 육지에서는 권율,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해냈다.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낸 '이치(梨峙) 대첩'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한양은 19일 만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무능한 왕실은 백성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았다. 56세의 늦은 나이에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대패했다.
순찰사 이광은 무계획적이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고, 군사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4만여 명의 군사들이 2천도 안 되는 왜군에게 어이없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전쟁 중에서 최대 패전인 '용인 전투'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그날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을 "마치 봄나들이 나온 양 떼들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순찰사 이광은 해임되었고 권율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금산성에 주둔하며 전라도로 진군할 계획을 세운다. 전주성을 노리고 있었다.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안정적으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병참기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한편 왜군의 첩보를 입수한 권율은 남원과 광주 등지에서 의병 약 1500여 명을 모집하여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전주성에 입성 후 이치(배재)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이치는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준한 길이다. 배나무가 많아서 이치(梨峙)라고 불렀다.
권율은 용인 전투에서의 패배를 교훈 삼아 곳곳에 목책을 세우고 검은 연기를 피워 위장술로 적들을 기만했다. 조총과 칼로 무장한 채 진격해오는 만여 명의 왜군을 맞아 강력하게 저항했다. 징과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마침내 왜군은 퇴각하고 용인 전투의 패배를 설욕했다.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낸 전투였다.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한다. 1592년 7월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