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철도노조 호남지역본부 본부장으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투쟁으로 해고된 조종철씨
정영동
6개월 신입사원이 던진 파문조종철씨는 순천 원도심에 위치한 금곡동 토박이로 1995년도에 철도공사(당시, 철도청) 광주전기사무소에 입사했다. 첫 근무지는 화순역이라 순천에서 1년 6개월여를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며 출퇴근했다. 당시 철도노조는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이었고 민주노조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의 철도공사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몇 손가락 안에 꼽는 공기업이지만, 입사 후 몇 년 동안은 불안감과 억압적인 직장 문화 때문에 힘들었다고 조종철씨는 회상한다.
"그 당시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면서, 평생 이런 근무 형태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건 몇 개월 지나니깐 익숙해졌는데, 직장 내 조직문화가 너무 힘들었다."
"출퇴근을 관리자 눈치보고 하는거다. 9시간 출근인데 8시 10분 출근해서 20분부터 일을 하고 있고, 9시 퇴근인데 10시가 되어도 퇴근을 못했다. 윗사람들이 퇴근해라 하면 퇴근을 하고, 쉬는 날도 관리자가 일하러 나오라고 하면 나가야 했다."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조종철씨는 9시 맞춰서 출근하고 선배들이 눈치보고 있어도, 9시 10분 되면 퇴근을 했다고 한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하는 것을 넘어서, 알아서 잘 보여야 승진할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직문화에 작은 파열구를 내는 일이 있었다. 입사한 지 6개월째인 1995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날, 첫 연휴를 아내와 지내고 있는데 직장 상사에게서 다음날 출근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틀 연휴이니 당연히 출근하지 못한다고 하자, 직장 상사는 화를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조종철씨는 곧바로 전화를 해서 '사정을 해도 부족할 마당에 왜 부당한 업무 지시를 하면서 화를 내냐?'며 따졌다.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선후배들이 하얀 눈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해 끝날 공사가 미뤄지자 철도청 직원들을 동원해 일을 시키는 것이 관행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그런 업무 지시를 거부한 것이 바로 6개월 신규직원인 조종철씨였다.
"당시에 눈치를 많이 받았지만 그 후론 제게 부당한 업무지시를 하지 않아 편해졌다. '조종철은 저런 놈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어용간부와 관리자가 현장을 통제하던 시절을 넘어"1995년 당시 철도노조는 지금처럼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위원장을 뽑는 게 아니라, 3중 간선제라는 제도하에서 위원장 선거를 치뤘다. '3중 간선제'는 세 번 간접선거를 거쳐서 철도노조의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이다.(각 지역 지부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이 각 지역본부 대의원을 뽑고, 그 대의원들이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을 뽑아서, 그 대의원들이 위원장을 선출한다.) 조합원수가 3만 명이 넘었지만 정작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은 그 당시 93명에 불과했다. 당시 철도노조는 민주노조라 불리울 수가 없는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2000년 1월 대법원은 '철도노조 3중 간선제 위헌 판결'을 내리게 되고, 2001년 5월 처음으로 조합원의 손으로 위원장 직접선거를 하게 되면서 철도노조는 민주노조의 깃발을 새롭게 올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 조종철씨는 자연스레 함께 하게 되었다.
"경직된 조직문화, 인사문제 등에서 많은 직원들이 민주노조를 세워야 겠다는 열망이 컸다. 당시 한국노총 산하 철도노조 간부들은 승진, 발령 등 문제에 깊이 개입했다. 노조 간부들에게 잘 보이면 관리자들에게 말이 들어가게 되고, 관리자들은 노조 간부을 통해서 현장을 통제했다."
"관리자들이 노조 간부 후보를 내고 조합원에게 투표를 하게 했다. 분산 사업장의 경우 사업소별로 10명 정도 근무하는데, 투표용지 상단에 손으로 자국을 남겨놓아서 누가 누구를 찍었는지 다 알 수 있었다. 관리자의 요구대로 투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