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편제>
영화 <서편제>스틸 이미지
어떤 노래가 좋을까 곰곰 생각하니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 구성진 단가 '사철가'의 가락이 귀에 맴돌았다.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김명곤)이 눈먼 송화(오정해)와 함께 정처 없이 이곳저곳 노래 품을 팔며 떠돌아다니는 장면에서 '사철가'를 부른다. 사계절이 지나가는 화면과 가사가 조화를 이뤄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노랫말에 사계절이 모두 나오니 어느 계절에 흥얼거리며 놀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갈수록 연륜이 쌓이는 나이이니 풍류와 운치가 느껴지는 우리 가락 하나 정도는 익혀두고 싶었다.
인터넷에 단가 '사철가'를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서양 음악은 누구나 악보를 보고 배울 수 있지만, 판소리는 악보라는 것이 없으므로 그저 명창들의 소리를 듣고 따라서 부르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국악 학원에서 배우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아 독학의 길을 택했다. 먼저 수많은 명창의 소리를 들어 보았다. 명창마다 그 맛과 깊이가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노랫말도 조금 달랐다. 가사를 프린트하여 가지고 다니면서 짬이 날 때마다 흥얼거리며 가사를 외웠다.
내가 부르는 '사철가'는 여러 명창의 이 구절 저 구절을 따와서 내 멋대로 연결했다. 문장으로 비유하면 짜깁기이고, 음식으로 비유하면 비빔밥이다. 고음 처리가 어려워서 계면조(국악에서 쓰이는 선법 중의 하나)의 저음으로 부르는 대목도 있고, 없는 아니리(판소리에서 창자가 소리를 하다가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엮어나가는 행위)를 넣기도 했다. 원래 판소리 자체가 이런 식으로 분화되며 새로운 창법을 더했다.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면서 뒤에 붙는 접미사 '제(制)'는 만들어진 모양새를 일컫는 말이다.
나는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면 풍덩 빠져들기를 잘한다. 지나치다 할 정도로 몰입한다. 초보자의 피아노 연주는 시끄럽기만 한 것처럼 음치의 노래는 듣기에 괴로운데, 나도 모르게 '사철가'가 흘러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각시가 "소리가 당신한테 와서 고생이 참 많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아요"라고 말했다. 못한다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다.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나도 인정하는 바이기에 그냥 웃어 주었다.
여러 달이 흐른 후 각시와 북한산을 오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철가를 불렀다. 그랬더니 "우와! 이제는 제법 들어줄 만하네. 듣기 좋아요" 하는 것이었다. 입에 발린 말이겠지만 마음이 살짝 우쭐해졌다. 그동안 짬이 날 때마다 갈고 닦은 소리였다.
"당신한테 칭찬까지 들었으니 이제는 득음까지 하여 소리꾼으로 나서보리다!" 호기롭게 흰소리를 날리고 내친김에 내가 선창을 할 테니 따라서 해보라고 했다. 부부가 흥얼흥얼 사철가를 부르며 천천히 산길을 오르는데, 지나치는 어느 등산객이 "참 보기 좋네요"라고 말했다. 행복이라는 것이 뭐 별것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서로 정다운 것 이상의 행복도 없다.
'맞장구' 덕에 북한산에서 막걸리 얻어먹은 사연얼씨구(얼을 심는다는 뜻), 으이, 얼쑤, 좋지, 허이, 그렇지, 아먼, 잘한다! 추임새에 대해서도 각시에게 말해 주었다. 추임새는 흥을 돋우는 소리이다. 청중들이 소리꾼을 격려하여 기운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소리를 못해도 추임새를 넣어 주면 흥이 살아나 조금이라도 잘하게 된다.
대화에서도 추임새는 필요한 요소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의 특징은 추임새를 잘 넣는다. 노련한 방송인들의 진행을 보면 추임새 넣는 타이밍이 아주 적절하다. "아, 예, 그렇지요,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상대방의 기와 흥을 살려준다. 대화에서 추임새는 칭찬이고, 배려이며, 공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