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을 잃은 생명이 어디 사람뿐이랴

[포토에세이] 거여동 재개발지구에서

등록 2018.02.07 10:05수정 2018.02.0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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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생명을 생각하고 사람을 생각했더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다. 오로지 자본의 이익과 잉여는 곧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재개발지구마다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집'이라는 의미가 그냥 집일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힘껏 땀 흘려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겨줄 때 집은 더는 집이 아니기로 했던 것이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사람이 떠난 그곳의 집들은 맨 처음에 굳게 입을 다물어 군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개발을 앞두고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되자 굳게 다물었던 입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 입을 열어 속내를 보여주자 신비감은 모두 사라지고 폐허의 아픔만 빈집에 쟁쟁거리고, 하릴없이 놀러 온 햇살만 머쓱하게 머물다 진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이미 몇몇 구역은 철거가 되어 흙더미를 가장한 쓰레기더미로 쌓였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났듯이, 사람이 떠난 뒤 그곳의 주인 행세를 하던 길고양이들도 떠났다. 그러나 길고양이들은 멀리 떠나지 못하고 몇 블록만 옮겨, 아직 철거되지 않은 빈집을 거처 삼아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 갈 길 잃은 생명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아직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다.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 아직도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다.김민수

길고양이를 위시하여, 좁은 골목길 보도블록 사이에서 피어나던 초록 생명이며, 화분에서 피어나던 생명과 쥐 같은 혐오감을 주는 것들도 이젠 다 떠나야만 한다. 초록 생명은 이미 입춘이 지났으니 올해에도 어찌 되었건 피어나겠지만, 제 수명을 기약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런 곳에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반질거리도록 쇠 수세미가 할퀸 흔적을 간직한 양은 냄비와 버킷과 다 녹슬어버린 연탄 화덕, 그리고 방과 이어진 부엌을 파고든 햇살 한 줌. 차라리 꿈이었으면 마음이 덜 아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개발지구 2018년 2월
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낡은 맨션 나무간판을 보고서야 '그런 이름의 맨션이 있었구나!' 실감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그곳을 뻔질나게 지나다니면서도 알지 못했던 존재, 이제 사라질 때 즈음에야 내게는 각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님을 본다. 어쩌면 곧 사라지게 될 거여동재개발지구도 지금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나의 고향처럼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자본의 논리로는 개발이 과정에서 누구는 이익을 보고 누구는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왜 우리 인간의 삶에서 자본의 논리가 진리가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다. 찬성이나 반대, 그런 근원적인 고민보다는 오로지 '돈', 여기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것이 재개발지구를 바라보는 아픔이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길고양이 2018년 2월, 재개발지구의 고양이들은 다 어디로 가야할까?
길고양이2018년 2월, 재개발지구의 고양이들은 다 어디로 가야할까?김민수

사람이 떠난 그곳엔 아직 길고양이들이 남아있다. 하나둘 철거를 마칠 때마다 그들은 또 다른 골목으로 피난을 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은 길고양이 같은 존재들과 공존할 가능성을 최대한 차단하는 건물을 지을 것이다.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가림막 사이로 겨울바람은 세차게 불고,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이제 저 골목을 왁자지껄 웃음소리로 채웠던 일들은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처음 거여동재개발지구가 생겼을 때 그 골목길은 희망으로 웃음으로 채웠던 꼬맹이들은 이제 다들 중년을 넘어섰다. 그들은 다 잘살고 있을까?

거여동재개발지구 2018년 2월
거여동재개발지구2018년 2월김민수

그래도 오랫동안 버티던 '새서울이발소'는 이제 간판과 이발소였다는 흔적만 남긴 채 떠났다. 떠난 그곳에 시멘트타일로 조악하게 만든 세면대와 쓰다남은 작은 비누 한 조각뿐이었다. '새 서울'로 거듭나는 일, 그것이 쉬운 일인가? 묻는 듯하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머지않아 아파트만 들어서면 너도나도 못 들어와서 안달할 최고의 '새 서울'이 될 것이니. 자본의 소리는 그렇게 외치며 스산한 골목길을 주인인 양 드나들고, 그곳의 주인이었던 사람과 길고양이는 떠날 곳을 찾고 있다.
#거여동재개발지구 #길고양이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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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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