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앞에서 1인시위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155일째 1인시위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2018년 1월 4일 현재)
안건모
중3 때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박성율박성율은 1963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거기서 살다가 아버지가 도자기 일을 하러 이천으로 나가면서 온 식구가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도자기의 명인 토정 홍재표씨와 함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 박성율은 이천 신둔초등학교를 나와, 북중학교, 북고등학교를 다녔다. 말썽은 피웠지만, 공부도 잘했고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범생'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중학교 3학년 때 코난 도일의 소설 <황금딱정벌레>에 나오는 암호를 흉내 내어 친구들한테 보냈다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일이다. 아마 가장 어린 나이에 대공분실을 경험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조사를 끝내고 안기부 직원들은 허탈해했다. 집에 돌아오니 온 식구가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건 외에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재수 없는 스타일? 실컷 놀면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 하하" 박성율은 그 말을 하면서 민망해했다. 박성율은 장로인 아버지를 따라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모범생, 한마디로 성실한 '교회 오빠'였다. 기타도 잘 쳤다. '기타 잘 치는 잘생긴 교회 오빠.' 그 당시 인기가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 교회 오빠를 따르는 여학생들 중 한 명이 지금 아내인 백향숙씨다. 백씨가 어릴 때를 회상한다.
"저는 중3 때 이천으로 이사했어요. 엄마가 짜장면 집을 하려고. 근데 교회 다니는 친구가 전도해서 교회를 나갔어요. 엄마는 불교 신자였거든요. 호기심으로 처음 교회에 간 날 오빠를 만났어요. 잘생긴, 기타 잘 치는, 멋있는 교회 오빠였어요. 그다음부터 열심히 주님을 만나러 다녔죠."박성율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른들은 교회에서 주일 성수를 해야 구원받고 천국을 보장받는다고 했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지옥에 간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들 주일예배 끝나고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박성율이 보기에 심각한 위선이고 지독한 모순이었다. 종교 개혁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신학교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박성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지원했다. 당시 학장이었던 변선환 목사가 박성율에게 왜 신학대학을 오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박성율은 "한국 교회가 썩었다고 생각해 종교 개혁을 하려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변선환 목사는 "허허허, 그놈 참. 허허허" 하고 웃기만 했다.
목사가 된 박성율박성율은 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부터 여주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준회원으로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 동생'이었던 백향숙씨와 결혼식도 올렸다. 여주에서 평범한 목회를 하면서 살았다. 농민들과 같이 모내기하고 밥 먹고 어울리며 살았다.
어느덧 9년이 흘렀다. 그즈음 박 목사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 목사의 장로 한 분이 박 목사를 찾아왔다.
"박 목사, 이런 시골에서 처박혀 있지 말고 도시로 나가 목회를 하면 어떻겠나?"박 목사는 도시 목회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1998년에 성남에 있는 OО교회의 부목사로 옮겨 갔다. 교인 수가 수만 명이나 되는 큰 교회였다. 그런데 금방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가 아니더라, 기업이지. 교회라고 하기에는 비리가 너무 심각했다." 교회 담임목사는 아랫사람들에게 충성을 강요했다. 박 목사는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했다. 무엇보다 교회가 영적인 느낌, 신앙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담임목사가 박 목사 같은 젊은 목사를 부목사로 불러들인 건 아들에게 세습하는 과정을 중간에 세탁하기 위해서였다. 젊은 목사들이 그렇게 이용당하다가 하나둘씩 다른 교회로 쫓겨났다.
박 목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날 담임목사는 목회 시간에 박 목사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발표해 버린다.
"박 목사는 다음 주부터 충남 홍성에 있는 교회로 가게 됐습니다."황망했다. 가장 추웠던 1월,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박 목사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충남 홍성으로 이사를 갔다. 눈물이 나왔지만, 아내와 아이들한테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홍성군 홍북읍 노은리의 시골 교회인데 신도가 40여 명 있었다.
당시 박 목사는 몸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전에 있던 교회 담임목사한테 인격적인 모독을 받으면서 참고 산 게 문제가 됐다. 화병인가,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까닭도 없이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몸으로 목회를 하니 신도들에게 미안했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알고 지내던 연세대 은준관 교수한테서 연락이 왔다. '실천신학콜로키움'에 참여해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박 목사가 연세대 대학원 진학을 문의했더니 은준관 교수는 다른 것을 권유했다.
"학교를 만들려고 해. 한국 교회가 썩어도 너무 썩었어. 영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신학교를 만들면 좋겠어." 은준관 교수가 꿈꾸는 건 신학대학원대학교였다. 박 목사는 학교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박 목사가 총무 맡으면 되겠네."실천신학대학원교회에 합류해서 목회를 시작했다. 2000년 10월 가칭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총회를 했다. 초대이사장으로 은준관 박사가 취임했다. 2002년 5월에는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대학원대학교 설립 허가를 취득했다. 2004년에 경기도 이천시 신둔면에 교사 건축을 완공했고 2005년 3월 실천신학 석사 과정 25명이 입학하면서 학교를 열었다. 박 목사는 그 모든 과정에 온 힘을 쏟았다. 학교 건물을 짓는 일부터 법인 취득, 설립 허가, 교수 채용, 학생 모집 등 모든 일을 처리했다.
학교가 설립된 뒤에는 총무과장으로 행정 일을 했다. 학교가 안정되면서 일도 점점 편해졌다. 이천으로 이사 와서 실천신학도 공부했다.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편한 때였다. 취미로 약초를 캐다가 심마니 선생을 만나 약초 공부를 하기도 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약초를 캐러 산을 찾았다. 그러면 모든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런데 행정 일만 하다 보니 뭔가 껄끄러웠다. 되돌아보니 자신이 학교 측, 교수 측, 사용자가 돼 있었다. 물 위에 기름방울처럼 떠 있는 듯했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 했나? 나도 떳떳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민중, 노동자, 농민 다 잊고 살았는데 너무 죄를 많이 지은 것 같다. 농촌으로 가자. 초심으로 돌아가자."2008년 1월 10일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퇴직금을 다 털어도 집을 살 수가 없었다. 당시 이천에서 도자기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소금공장을 하고 있었다. 그 공장 귀퉁이에 방 한 칸을 들였다.
박 목사는 오자마자 동네 반장을 맡았다. 혈연 지연에 틀이 박힌 농촌 분위기였기에 외지에 오래 나가 있었어도 그는 외지 사람이 아니라 고향 사람이었다. 새마을지도자협의회에서 협의회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관변단체였지만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과 어울릴 수 있는 직책이라고 생각해서 박 목사는 수락했다.
"내가 새마을지도자협의회 의장이 아니었다면 관변단체들의 내막을 알기 힘들 텐데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골프장 막아야 하지 않아?홍천으로 들어온 그해였다. 동네 모임에 갔는데 이장 친구가 박 목사에게 말했다.
"이 동네에 골프장이 들어온다는데 괜찮은 건가? 골프장 막아야 하지 않아?" 박 목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이었다. 양심이 있으면 당연히 막아야 했다. 당시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양재성 목사한테 연락해 의논을 했다. 활동가도 없고 막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골프장 허가 서류를 검토해 보니 엉터리였다. 허가를 내주면 안 되는 곳인데 허가를 내줬다.
"집회 서너 번 하면 끝날 줄 알았다." 한 건설사가 홍천에 27홀짜리 퍼블릭골프장을 짓겠다고 강원도청에 서류를 냈는데 환경영향평가서, 실시계획인가서 등을 보니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골프장을 짓겠다는 그곳이 생태 자연도 일등급 지역이었다. 생태적으로 보존 가치가 높아서 개발이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그런데 개발 허가 나기 2년 전에 그 산을 벌목한 적이 있었다. 생태자연도 등급을 떨어뜨리기 위해서였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인허가 서류를 군과 도에 제출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다.
상수도 유하거리 문제도 있었다. 상수도보호 구역에서 개발 부지까지 최종 배출구로부터 거리가 15km 안에 있을 때는 개발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서류에 24km로 나와 있었다. 대책위 사람들이 줄자를 가지고 직접 재 봤다. 서너 번 실측했는데 13.3km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위성 실측과 지도 전문가들을 불러 현장 실측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법 위반이 너무 명백했다.
"날고 기는 놈이 와도 법을 위반한 거니까 '이 정도면 싸울 만해. 공무원들도 이걸 보면 취소하겠지' 했다."'누가 나서지 않으면 나라도 해야지' 하고 주민대책위를 만들었다. 시골 촌부들도 골프장이 들어오면 더는 농사를 못 짓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싸우기 시작했는데 박 목사와 대책위 농민들은 살다 살다 기가 막힌 꼴을 다 봤다. 국립환경과학원에서 내려와서 생태자연도 변경을 할 때 현장 실측을 해야 하는데 하지도 않았고, 교수들하고 밥만 먹고, 생태자연도 작성지침을 위반한 것은 거론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골프장 건설을 찬성한다는 주민동의서 도장을 받았는데 가짜가 많았다. 대개 시골에서는 이장이 동네 주민들의 도장을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찍다 보니까 죽은 사람 도장도 찍혀 있었다.
너무나 명백한 법 위반에 순박한 농민들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박 목사는 기도회와 집회를 하면서 소송을 걸었다. 그런데 소송 도중에 황당무계한 일이 터졌다. 판사가 실측을 해 보자고 해서 법원에서 실측 조사반이 나오기로 했다. 실측 나오기로 한 날 대책위 측 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박 목사님, 재판 취소가 됐어요. 우리 대책위 사무국장이 재판을 취소했대요.""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대책위 사무국장이 대책위와 건설사가 합의했다고 허위로 작성한 대책위 회의록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재판은 끝나 버렸다. 하지만 박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무국장이 허위로 회의록을 만든 증거를 제출하고 합의 무효소송을 냈다. 그 소송에서 1심은 대책위가 이겼다. 건설사가 어수룩한 노인네를 증인으로 내세웠는데 그게 실수였다. 그때는 좋았다. '역시 정의는 살아 있어' 하며 기뻐했다.
항소장이 날아온 지 한 달 만에 2심이 열렸다. 그런데 판사가 원고 부적격을 들고 나왔다. 판사가 빈정거렸다.
"대책위가 실체가 없는 거 아닙니까? 원고로서 자격이... 대책위라는 거, 우리 다 알잖습니까? 사무실이나 있겠어요?"사무실 계약서와 운영한 내용을 다 보여 줬다. 판사는 또 이렇게 비꼬았다.
"사무실이야, 아무 데나 찍어 오면 되지,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대책위 정관이나 조직도 명부라는 게 있어요? 그런 게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박 목사는 다시 주민 확인서를 다 받아 와 판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판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또 이렇게 빈정거렸다.
"아니, 이 재판 왜 하는지 모르겠네, 이거 합의했고, 돈 다 나눠 줬는데 무슨 재판을 해요? 그리고 원고적격을 인정받으려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증거 서류를 가져와 봐요."박 목사는 다시 군청에서 오고 간 공문들, 대책위 이름으로 집회 신고를 한 공문, 감사원에서 내려온 감사 통보 등등 대책위 이름으로 공문 오고 간 것들을 다 갖다 줬다.
"그런데 이 판사 XX가 행정과 사법은 별개라는 거다. '이게 뭐 행정부에서 보낸 거지, 우리 사법부는 이거 인정 안 해요', '행정과 사법이 엄격히 분리되니 대책위가 청와대로부터 받은 임명장이나 강원도나 홍천군에서 받은 임명장을 가져오시오'라고."며칠 뒤에 재판을 연다는 통보도 없이 판결문이 날아왔다. '기각! 원고 부적격'. 대법원까지 상고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