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외모 이야기나 불쾌한 농담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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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내 자리 옆에는 양복을 단정히 갖춰 입은, 마른 체구의 남자가 앉았다. 이륙한 지 대여섯 시간쯤 지났을까, 옆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상품 카탈로그를 건성으로 뒤적이는 것을 보니, 꽤나 지겨운 모양이었다.
"뭐 하는 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자기는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내가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고 하자, '외국에서 가르치려면 그 나라 말을 정말 잘 해야 되지 않느냐'고 묻는다. 기본적 소통 능력은 필요하겠지만, 좋은 선생이 되는 데 언어가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 강의하는 분들 대부분이 한국어에 능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강의를 잘하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고 하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은 선생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래 생각하고 많이 준비하는 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이제 그는 질문을 바꾸어, '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나는 '일상적 문화에 적응하기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고 답했다. 일상의 말과 행동을 고스란히 외국으로 옮겨온다고 할 때, 있는 그대로 바람직한 면이 있고,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반드시 피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예컨대 한국인들 다수가 지닌 다정하고 겸손한 태도는 세계 어디서든 환영 받는다. 하지만 습관적으로 상대방 외모를 거론하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이것은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행동이므로, 한국에서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허, 이제 여자와는 말도 못 하겠네요." 그렇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외모 이야기나 불쾌한 농담 아니고 할 말이 없다면 입을 다무는 편이 낫다.
법무장관 외모를 거론해 혼줄 난 오바마
미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에서는 외모에 대한 부정적 발언은 물론, 칭찬하는 말까지도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한국 남성 유학생이 여성 학생을 치켜세운답시고 '섹시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기겁한 일이 있다. 정말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외모 자체를 언급하지 말아야 하며, 꼭 칭찬하고 싶다면 그 사람 신발이나 가방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
한국에서 강의했던 한 미국인 교수는 남자 교수들이 시도때도 없이 외모를 입에 올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공개강연이나 학회에서 교수를 소개하면서 '우리 학교 모델'이니, '우리 학과의 바비인형' 따위의 말을 스스럼없이 한 것이다. 그는 그때마다 당황스럽고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2013년 오바마는 말 한 마디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법무장관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칭찬 때문이었다.
"그녀는 뛰어나고 헌신적이며, 강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가장 출중한 외모(best looking)를 지닌 법무장관이기도 하지요." 미국 매체뿐 아니라 전세계 언론으로부터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오바마 자신도 부적절한 발언이었음을 시인한 뒤, 당사자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남자가 여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 역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외모를 언급하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여성을 응시하는 행위도 성희롱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1년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같은 직장에서 여성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행동이 성희롱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불만이 제기된 뒤에도 즉각 조치를 취하지 않은 회사 측도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응시에 성적인 의도가 담겨있지 않은 경우까지 성희롱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판결문을 들여다 보면 논리는 명확하다. "상대가 남성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여성에게 했다는 사실은, 그 행위가 성적 차별에 근거한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