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상업활동이 활발했던 에도 거리 모습을 그린 우키요에.
Wikimedia Commons
한국은 왜 근대화의 문턱에서 일본에 뒤처졌을까
"에도시대는 당시 조선시대의 거울이자 동전의 양면으로, 이 시기를 보면 조선의 상황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그것이 주변국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다. 한국의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 통찰과 영감을 원하거든 <삼국지>나 <손자병법>이 아니라 에도시대 역사를 들여다보라." - 책 본문 중
저자는 이렇게 일본과 조선의 갈림길을 17세기로 소급한다. 에도시대 국가의 지배 영역 바깥인 시장을 활용하는 민간의 힘이 급성장해 근대화를 위한 동력을 축적할 수 있었다. 17세기~19세기에 축적한 역량의 차이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서구 열강의 동양 진출)의 시기에 서구 세력에 대응하는 역량의 차이로 이어졌다.
일본보다 늦었지만 조선후기 의미 있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등의 소수 학자들이 주창한 실학이다. 하지만 실학은 논의만 됐을 뿐 국가의 역량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전남 강진에 유배 중 500여 권이나 책을 쓴 정약용(1762∼1836)의 저술은 간행되지 못했다.
경제, 과학, 공학 등의 분야를 아우르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식인이자 천재라 불리는 인물을 조정은 활용하지 못했다. 다른 실학자들의 저서도 끝내 출판되지 못한 채 필사본으로만 전해지다가 일제 강점기 때인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책으로 나왔다.
에도시대에 발간한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은 상징적이다. 1808년에 들어온 서양세력에 대한 막부 정부의 경각심은 외국어 학습의 동기가 되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白戰不殆)'의 실천적 결과물로서, 영어를 번역해 만든 일본 최초의 영일사전을 만들게 된다.
이때 지금의 우리도 자연스럽게 쓰는 자유, 경제, 물리, 화학 등의 말이 탄생하게 된다. 개항 이후 이뤄진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는 에도시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긴 '언어의 통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영한사전을 만든 이는 구한말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뿌리와이파리, 2017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