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줏간 앞의 개니체의 글귀를 축령산 전망대에서 쓰다. 항상 욕심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할 일이다.
이명수
2500년 전, 서양 철학의 기틀을 마련했던 플라톤과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결핍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욕망이라고 인식했다. 이러한 인식은 서양 철학의 큰 물줄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도도히 흐르고 있다. 욕망의 본질은 결핍이고, 결핍이 있어야 채우고 싶으며, 그것을 채워가면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내 몸, 즉 형이하학의 말단으로부터 시작하여 형이상학으로 이끌어 가는 욕망에 대한 담론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동양의 현자들도 일찍이 인간의 욕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멈출 줄 모르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양 철학의 우뚝 솟은 양대산맥을 이룬 유가(儒家)와 도가(道家)의 경전을 보면 욕심을 경계하고 위험시하는 내용이 참으로 많다.
모든 죄악의 씨앗은 욕심이다. 욕망과 욕심을 가장 경계하고 죄악시하는 것은 불교 철학이다. 탐욕은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癡)의 첫 번째로 반드시 제거해야만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의 경전에서 욕망은 곧잘 타오르는 불에 비유된다.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면 그 당사자를 만신창이로 만들기 때문에 그 끝은 언제나 비참하다.
철학자 니체는 인간의 욕망을 '푸줏간 앞의 개'에 빗대서 표현했다. 어느 책에서 이 표현을 읽고서 참으로 절묘한 비유라고 생각했었다. 눈앞의 고기를 먹고 싶은 욕망과 푸줏간 주인의 시퍼런 칼이 두려워서 전진할 수도 없고 후퇴할 수도 없어 하염없이 머뭇거리는 한 마리의 개가 눈앞에 그려지는 표현이다.
푸줏간 앞을 서성거리는 그 가련한 개가 이따금 내 모습으로 투영될 때가 있다. 살면서 욕심나는 것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욕망이 크고 집요하게 동할 때면 푸줏간 앞을 서성거리는 개가 떠오르는데, 그때는 임계점이 넘지 않도록 힘껏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제대로 제어하기만 하면 색욕을 포함해서 욕망하는 일 자체가 생명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두 마리의 늑대가 산다고 하는 인디언의 전설이 있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사사건건 싸우고 있는데, 이기는 쪽은 언제나 그 마음의 주인이 먹이를 주는 쪽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 전설이 내포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아주 오랫동안 사유하면서 걸작 <파우스트>를 완성했을 것이다. 파우스트는 "아, 내 가슴속에는 두 개의 영혼이 살고 있구나!" 하면서 마음속에서 다투는 천사와 악마를 회한이 가득한 눈으로 돌아보고 있다.
욕망은 야누스와 같이 앞뒤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빛과 어둠, 창조력과 파괴력을 동시에 지닌다. 대체로 욕심은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지 못할 때 생기는데, 좋은 것을 혼자만 차지하려고 하는 이기심이 증폭하여 생각의 눈과 귀를 막고 사리 분별력을 떨어뜨린다.
눈앞에 있는 욕심을 버리면 건강한 욕망이 뚜렷해진다. 동물계의 한 종인 호모사피엔스가 여타 동물과 구별되는 뚜렷한 점은, 그것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절제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짐승으로 살아갈 것인가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의 선택은 그 사람의 몫이다.
면접관의 돌발 질문 "욕망과 욕심의 차이는?"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밝혀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결핍을 해소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되는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 동기에 의해 나타나는 욕망이다. 전자는 동물적 본능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후자는 그보다 훨씬 차원이 높다. 저차원적 욕망이 채워지면 자아실현을 위한 성장 동기에 의해 고차원적 욕망이 생긴다.
성장 동기에 의한 건강한 욕망이 강한 사람은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지혜가 깊고 마음에 여유가 넉넉하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실현에서 최고의 보람과 행복을 느낀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취임 연설에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인간 존재에 대한 링컨의 숭고한 욕망이 흑인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세상에 필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자신이 꿈꾸던 욕망을 아름답게 승화시켰다. 이런 고차원적 욕망 때문에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고 세상은 희망적이다.
이를테면 욕망이란 씨종자와 같은 것이다. 밭에 씨를 뿌려야 싹이 자란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욕망의 씨앗을 '마음밭'에 심으면 욕심이라는 잡초가 심술궂게 돋아난다. 잡초의 생명력은 끈질기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조금만 내버려 두면 삽시간에 밭은 잡초로 무성해져서 농사를 망치게 한다. 그러기에 수시로 잡초를 뽑아내면서 곡식이 잘 자라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욕망과 욕심이란 말은 혼용되고 있지만,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젊은 시절 내가 출판사의 일자리를 구할 때, 어느 출판사의 사장이 면접을 보다가 불쑥 '욕구, 욕망, 욕심, 탐욕'에 대하여 말해보라고 하였다. 어휘력을 측정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밀렸는지는 모르지만, 그 질문과 그날의 씁쓸함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흉보면서 닮는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면접관의 자리에 오르고부터 똑같은 질문을 던질 때가 여러 번 있었다. 단어의 뜻을 제대로 구분하여 명쾌하게 설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양과 자격이 엇비슷한 입사 지원자가 여러 명일 때면 누구를 선정하면 좋을까를 깊이 생각하게 되는데, 대답 하나로 결정되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괜찮게 생각되는 어느 여성 입사 지원자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눈빛이 서글서글한 그녀는 "혹시 금어초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그 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다고 말했다. 대답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였다. 그녀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꽃의 모양이 금붕어를 닮아 '금어초'라고 한다. 레이스가 달린 것처럼 아름다운 꽃이 시들어 말라가면서 해골 모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악마의 꽃' 또는 '해골 플라워(skull flower)'라고 부르기도 한다. 꽃말은 '욕망, 탐욕'이다. 건강한 욕망은 꿈이며 희망이기 때문에 피어나는 꽃처럼 아름답지만, 도가 지나쳐 탐욕의 단계로 들어서면 급속도로 무섭고 끔찍한 해골처럼 변한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 굉장히 재치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꽃과 꽃말, 피어 있을 때와 시들었을 때의 모습을 빗대어 욕망과 욕심을 잘 설명한 것 같았다. 그 대답을 듣고서 그녀를 낙점했다. 사람을 만나면서 많이 배운다. 통찰력과 분별력이 있는 손윗사람에게서 배울 점이 많지만, 지혜로운 손아랫사람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사람이 죽을 때 손바닥을 보이는 이유인간이 탐내는 것은 그 종류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탐낸다. 좋은 집과 고급 승용차, 백화점에 진열된 진귀한 보석류와 값비싼 의류, 각종 상품을 소유하려고 한다. 재물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매력 있는 사람까지 소유하길 원하고,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욕심을 부린다.
아흔아홉 개를 가지고도 한 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려고 한다. 탐욕이란 이름으로 통칭하는 '아귀(餓鬼)'의 잔인한 목마름은 끝도 없고 지치지도 않는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이 산 저 산의 나무를 다 잡아먹고도 항상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아궁이와 같고,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 빠진 독과도 같다.
승려로서의 길을 꿋꿋하게 걷다가 열반에 든 법정 스님이 남긴 화두는 '무소유'이다. 산문집 <무소유>에 담긴 골수는 '맑은 가난'이다. 영혼이 깨어 있으려면 가난은 필수조건이라고 넌지시 귀띔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불필요한 것을 가지면 그것에 얽매여 마음의 평안을 잃게 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물이 자신을 잃지 않는 임계점, 99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