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한강 '채식주의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서울국제도서전 국제관에서 열린 2016 한국문학 세계화 포럼 초청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제가 번역한 영역본 <채식주의자>가 물론 한국어 원작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전적으로 옳습니다. 간단하게는 문자 그대로 옮긴 번역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그 어떤 두 언어에서도 문법이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는 없으며, 단어 역시 각기 다르고, 심지어 구두점조차도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번역가들이 그들 자신을 충실한 번역가로 여기지만, 충실함의 정의는 분명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서로 다르게 기능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 번역은 서로 다른 수단에 의해 유사한 효과를 거두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 변화, 해석은 비단 완벽하게 정상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충실함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자 충실한 번역의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원작이 번역본과 같은 수준의 성공을 그 어디에서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채식주의자>의 수준이 번역되면서 훨씬 더 향상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별적인 사고의 결과입니다. 어쨌든 <채식주의자>의 중간에 실린 작품(번역자 주: <몽고반점>)은 한국의 문학상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물론 맨부커라는 브랜드가 부여한 성공에 비견할 만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실 한국 문단은 국내 문학상보다는 국제 수준의 문학상을 훨씬 더 신뢰합니다. 그러나 다른 기준들에 비추어 볼 때도 <채식주의자>는 분명 '이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 영역본이 출간되었을 무렵, 원작은 출간된 지 만 7년 만에 14쇄를 찍었고 2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그때 중국과 아르헨티나, 폴란드, 그리고 베트남에서도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 이는 한국어로 된 작품으로서는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다시 문화 제국주의 하에서는 이런 비영어권의 번역이, 설사 그것이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국제적인 성공 궤도에 올리지 못합니다.
제게 보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지점은 각각의 번역본이, 제 영역본과 마찬가지로, 번역가가 그 작품에 그들의 시간을 할애하길 원하게 될 만큼 깊이 사랑에 빠진 결과 탄생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7년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부 사이의 강간이 범죄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에 만연해 있는 그러한 구조적 폭력을 드러내는 이 작품이 어째서 (대체로 나이 든 남성들로 이루어진) 기성 문단과, 그것을 전혀 "극단적이고 기괴하게" 여기지 않는 많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다르게 받아들여졌던 것인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채식주의자>의 미학적인 측면에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러한 정치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요?
한강은 <채식주의자>의 "강력한 이미지"(더가디언),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빼어난 구조"와 "압도적인 클라이막스, 변화무쌍하지만 진실한 감정"(퍼블리셔스 위클리)과 같은, 번역가와는 무관한 것들과 관련해 대단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구조, 플롯, 주제, 캐릭터, 기타 등등은 모두 작가의 것입니다. 번역가는 문장과 관련된 것들, 즉 문체, 언어, 어조, 리듬을 다룹니다. 그리고 한강의 한국 독자들은 언제나 그녀의 '시적인' 문체를 강조합니다.
2011년에 나온 한 기사에서는 그녀를 "서정시 같은 문체와 디테일한 구조로 주목 받는" 작가로 소개했습니다. <경향신문>의 2017년도 기사에서는 한강의 소설에 대해 "시와 닮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시집을 출간한 바 있는 한강에게는 실로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었으며, 아울러 그 기사는 섬세하고 관능적인 문체가 한강의 특징임을 거론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채식주의자>에서는 그러한 서정성이 <소년이 온다>나 특별히 그녀의 가장 최근 작품인 <흰>에서 보여주고 있는 산문시 연작에서만큼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절제된 형태의 미묘하게 시적인 문체가 그 근저에 흐르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저는 과도하게 수사적인 영어 문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으며(비록 일반적으로 소설은 단조롭지 않으나 훨씬 더 강렬하고 압도적인 순간들을 포착하는 경향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번역본의 문체가 '미묘하고(인디펜던트)', '정확한 동시에 군더더기 없으며(아이리쉬 타임즈)', '뼈대만 남긴(뉴 스테이츠먼)' 문체라고 묘사했습니다. 동시에 그 시적인 특성도 언급되었는데, 이는 그것이 앞선 평가와 상호 배타적인 측면이 있다는 점에 대한 인식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가령 작가 데보라 레비(Deborah Levy)는 "시적이지만 사실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제 번역이 시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절제된 문체의 원작을 지나치게 시적으로 변형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견해,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강의 글쓰기에서 저와 다른 많은 이들이 발견한 시적인 것을 간과하도록 만듭니다. 물론 '지나치다'는 것은 견해 차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문학적 스타일은 단순히, 혹은 온전히 지문(指紋)과 같이 정체성의 표지에 불과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기능과 의미를 지닙니다. 기능적인 측면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채식주의자>의 차갑고 절제된 산문체는 작품 속에 나타나는 과열된 폭력을 상쇄시키고, 그것이 선정적으로 비치지 않도록 하며, 무엇보다도 그와 같은 어두운 공포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의미는 '이 작가의 동시대인들은 어떤 스타일을 사용하는가?'와 같은 질문의 맥락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까다로운 지점입니다. 무엇이 주류이며, 무엇이 찬사를 받고, 무엇에 '현대적', '창조적', '실험적' 또는 '문학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가와 같은 질문들 말이죠.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모호함과 반복성, 평범한 산문체로 이루어진 언어에서 정확성, 간결성, 서정성이 선호되는 언어로 옮기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이는 거친 일반화이자 포착 가능한 현상으로서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각 작가 개인의 스타일은 중간값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와 같은 점들로 구분되며, 따라서 스타일이 갖는 의미는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번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가령 반복 혹은 시적인 산문체의 표현으로 나타낸 '막대'가 기준 언어와 대상 언어에서 서로 다른 높이로 꽂혀있다는 점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기준 언어의 관습들이 그대로 대상 언어에 옮겨진다면, 그것은 작가의 독특한 표현이나, 훨씬 더 나쁜 경우, 나쁜 글쓰기 방식으로 오인되기 십상입니다.
번역의 질은 번역가가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입니다. 많은 이들은 가능한 경우 현지화하는 방식에 저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만두 카자(Mandhu Kaza)와 같은 이들은 반항적이고 잘못된 번역이 이민자들, 이민자자들의 자녀들, 그리고 스스로 디아스포라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네이티브 스피커들의 인종적 특권에 도전할 수 있게 하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제는 각 번역가들이 번역에 대해 특정한 접근 방식이나 신념을 일관되게 고수한다고 상상하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번역가들 역시 작가들이 그러하듯 수시로 마음이 바뀌고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번역하는 텍스트들로부터 실마리를 얻는 한편으로, 우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접근법들을 허용하는 텍스트들에 이끌립니다.
그래서 제가 배수아의 글쓰기에서 느끼는 매혹은 부분적으로 배수아가 한국어를 통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제가 영어의 경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반면에, <채식주의자>의 경우 저는 영문학적 언어 관습에서 너무 벗어날 때 그 글쓰기가 갖는 전복적인 힘 자체를 축소시키거나 분산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우리가 계속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