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돈이 순교했을 때 날아간 머리가 떨어졌다는 백률사. 법흥왕 이후 신라는 불교왕국으로 번성했다. 소금강산 울창한 대숲 인근에 지어진 백률사의 모습을 상상과 현실을 결합해 그렸다.
이건욱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掘佛寺址 石造四面佛像)을 지나 백률사(栢栗寺)로 오르는 길.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경주 동천동에 자리한 소금강산은 험하고 높은 산이 아니다. 그러나, 평소 등산이나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기에 오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빼곡히 대나무가 들어찬 숲 아래서 숨을 골랐다. 계절과는 상관 없이 청아한 대나무의 푸른 빛깔이 지친 마음과 산을 오르는 스트레스를 위로해줬다.
오가는 사람들이 드문 산길. 잠시 잠깐의 조용한 휴식 속에서 <논어> 자로편(子路篇)의 인상적인 구절이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올랐다.
'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從(기신정 불령이행 기신부정 수령부종)'. 법흥왕과 이차돈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당한 문장이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하면 "옳은 뜻을 가진 자는 애써 명령하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는 명령을 해봐야 그것에 따르는 이가 없다"가 아닌가.
6세기 초반. 법흥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을 강화하고,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불교의 공인을 위해 누군가 나서 희생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을 버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기에.
스물한 살 청년 이차돈은 법흥왕이 '옳은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랬기에 순교를 자처할 수 있었다. 명령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것이다. 바로 이 법흥왕과 이차돈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신라가 불국정토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설화에 의하면 백률사는 순교자 이차돈의 베어진 머리가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지어졌다. 백률사 주위에는 지조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차돈의 삶과 죽음, 그것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