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여 년 전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복원시켰다. 법흥왕 당시에도 ‘경주의 상징’으로 불리는 소나무는 무성했을 것이다. 소나무 숲 안에 웅장하게 자리 잡은 절의 모습을 그렸다.
이건욱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어렵게 찾아갔으나 어디에도 왕이 거닐었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황사로 뿌연 하늘 아래 쓸쓸한 바람이 불어올 뿐이었다.
경주시 사정동 옛 흥륜사터에 지어진 조그만 절. 대웅전, 석등, 범종(梵鐘)과 이차돈 순교비를 모사(模寫)한 비석만이 이곳이 6세기 무렵 '왕의 사찰'로 불렸던 흥륜사(興輪寺)가 있던 자리임을 추측케 했다. 방문객이라곤 기자 하나가 전부였다.
이차돈의 순교 이후 법흥왕과 진흥왕에 의해 증축·재건된 흥륜사는 명실공히 신라를 대표하는 대가람(大伽藍·규모가 크고 불력을 인정받은 절)이 된다. 흥륜사가 거대 사찰로 변신을 시작한 시기는 535년(법흥왕 22년)으로 추정된다.
사학자 김태형의 논문 <이차돈 순교유적과 유물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법흥왕이 첫 삽을 뜬 흥륜사 재건은 조카인 진흥왕 재위 5년(544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된다. 자그마치 9년 동안 진행된 대공사였고, '불국정토 신라 건설'이라는 백부 법흥왕의 뜻을 이어받은 진흥왕의 의지가 없었다면 이루지 못했을 프로젝트였다.
진흥왕은 법흥왕 이상으로 불심이 깊었던 인물로 여러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진흥왕 또한 큰아버지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말년엔 왕의 권위와 권력을 망설임 없이 버리고 승려가 된다.
진흥왕의 법명은 법운(法雲). 흥륜사는 전직 왕인 법운이 주지로 있던 절이었다. 그러했으니, 당대 신라에서 흥륜사가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스물한 살 젊은이 이차돈의 죽음이 새롭게 탄생시킨 사찰 흥륜사.
국가와 신라왕실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친 사찰 보각국사 일연의 <삼국유사>와 한국불교연구원이 간행한 <신라의 폐사(廢寺)> 등에 따르면 흥륜사는 불교를 전하러 신라에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세워진 시기에 관해서는 학설이 엇갈리고 있으나, 통상은 눌지왕(재위 417~458년) 때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