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경주박물관이 소장한 ‘이차돈 순교비’.
이용선 제공
왕궁엔 팽팽한 긴장감과 공포감이 떠돌았다. 왕은 수많은 벼슬아치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묶여 있는 해사한 20대 청년에게 물었다.
"네가 죽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 말을 믿어도 좋으냐?" 청년이 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게 인간의 목숨이라지만, 큰 뜻과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을 두려워 해서야 어찌 장부라고 하겠습니까. 제 죽음으로 이 땅에 불법(佛法)이 바로 선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 잠시잠깐 망설이던 왕은 청년의 목을 베라고 명한다.
위의 장면은 신라의 23대 왕인 법흥왕과 순교자 이차돈(異次頓·506~527)의 마지막 대화를 상상력을 바탕으로 풀어 쓴 것이다. 514년부터 36년간 신라를 통치한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왕권국가의 기초시스템을 구축한 현명한 군주였다. 또한 그는 신실한 불교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법흥왕은 함부로 불교의 교리를 설파하고 승려들을 친절하게 대할 수 없었다.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귀족들 상당수가 불교의 유입을 막고, 공인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차돈이 스스로 '처형'을 요구했던 이유는?
이차돈은 불교를 받아들일 수도, 내칠 수도 없는 법흥왕의 딜레마(dilemma)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스스로 죄를 뒤집어쓰고 "만약 불교가 자비롭고 옳은 종교라면 내 죽음에서 이적(異跡·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남)이 나타날 것"이라며 스스로 처형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말 '이적'이 일어났을까? 전해오는 역사서들은 스물한 살 신라청년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다.
"옥리(獄吏)가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잘린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산정에 떨어졌다. 하늘은 어두워지고 진동하는 땅 위로 꽃비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