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재, 윤정옥, 신혜수 정대협 상임대표.
이명옥
2017년 11월 3일 일본군'위안부' 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윤정옥 교수가 깜짝 등장했다. 1988년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그녀는 1925년 생으로, 위안부 실체를 밝히고 평생을 위안부 문제 해결에 헌신했다(그녀는 1990년 11월 16일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남자들은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그녀가 말하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인가.
여자들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나.
위의 두 질문보다 앞서, 그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떠난 걸까.
그녀도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하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될 뻔했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학교 측의 강요로 정신대 자원서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권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금강산으로 피신해 정신대로 동원되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여성들을 강제징발,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삼았다. 일본 후생성은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조선여성을 강제징집했다. 노동력을 착취당한 근로대로 동원된 여성들 중 다수는 위안부가 되었다. 근로 정신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
문필기, 이효순, 최금선, 이기정. 그녀들의 공통점은 윤정옥 교수와 같은 1925년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윤정옥 교수에게는 없는 그녀들만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 모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윤정옥 교수는 해방 후 일본군'위안부'가 되었던 여성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에 강제 연행된 남성들이 속속 귀환하던 당시, 여성들의 귀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윤정옥은 스스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에 헌신한다.
우리나라는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다. 1932년 상하이에 처음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말부터는 대대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고 점령지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한다.
일본군대의 위안소가 세워진 지역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곳'이라고 말해진다. 본연구회에서 조사한 전위안부들이 있었던 지역도 일본본토와 대만, 조선 등의 식민지를 포함하여 중국, 만주, 남양군도 등 일본군의 점령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한 지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대의 이동에 따라, 또는 개인적 사정에 따라 여러 지역을 이동했다.
일본군'위안부'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중 살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는 2만 명으로 추정된다. 6만 명에서 18만 명의 여자들은, 윤정옥 교수의 말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2. 그녀들은 누구의 딸들인가"열세 살 때(1940년) 어린 여자와 처녀들을 또 잡으러 왔다는 소문이 들려 쌀뒤주 안에 숨기 시작했다. 마산 완월동에 있는 애들이 많이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났다. 그때 아버지가 완월동과 자산동 친구들을 만나보니 딸들을 많이 시집보냈다고 하시면서 일본 사람들이 호적을 보고 시집만 갔다고 하면 안 잡아간다고 했다. 시집을 가면 안 잡아간다고 해서 당시에 여자들은 영감한테도 시집가고 병신한테도 시집갔다고 했다." - 일본군'위안부' 강무자 증언"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 엄마가 헌병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 놓고 가라'고 하자, 헌병은 다리로 엄마를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 일본군'위안부' 진경팽 증언"열여섯 살 때였다. 1932년이었을 것이다. (…) 초가을쯤 되는 어느 날 물동이를 이고 집에서 떨어져 있는 동네 우물로 나갔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낚아채었다. 물동이는 내동댕이쳐졌고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 일본군'위안부' 최일례 증언위의 증언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절대 다수가 10대였으며, 강제연행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는 모두 19명의 증언이 실려 있다. 그녀들 대부분은 폭력(3명), 취업사기(13명,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 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유괴납치(2명), 팔림(1), 기타(1명)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두 명의 경우 각기 두 번의 다른 연행과정을 겪어 전체 합계가 21명이 되었다고 증언집 해설에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했기 때문에 경찰서 옆에서 어머니가 야채를 파는 작은 가게를 했다. 가정 상황이 어려워서 학교는 못 다녔다." - 일본군'위안부' 오오목 증언"아버지는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고 집안살림이 어려웠다. 학비를 낼 형편도 못 되어 학교 입학을 미루다가 열두 살에 보통 학교에 들어갔다." - 일본군'위안부' 하순녀 증언 "여덟 살부터 남의집살이를 했다." - 일본군'위안부' 이용녀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