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0항쟁 당시 유시춘 작가가 올라갔던 서울 중구 정동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은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희훈
1987년 6월 10일, 유 작가는 바로 이곳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 종탑에 올랐다.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사기극을 즉각 중단할 것을 국민의 이름으로 요구한다." 유 작가가 외쳤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 상임집행위원 30명 중 한 명으로, 총 다섯 명의 여성위원 중 한 명으로, 민주주의를 바란 시민 중 한 명으로 낸 외침이다.
종탑에서 섰을 때 종소리에 놀라 나무에서 날아간 비둘기를 봤다. 창공으로 자유롭게 날아갔다. 밝은 예감이 들었다. 지금까지 품고 사는 기억이다. 그 덕분인지 성명을 발표하기 전 무섭거나 두려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유 작가는 이미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 2년 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총무로 활동하며 법정, 집회, 교도소 앞을 지키며 독재의 엄혹함을 몸소 체험해왔다. 머리채를 잡힌 채 차에 태워 아무것도 없던 들판에 내려진 기억이 수차례다.
"1987 영화에 연희가 삼촌을 찾으러 갔는데, 경찰이 봉고차에 태워 어디 들판에 내버리잖아요. 저도 꼭 그랬어요. 저는 난지도 한가운데 버려졌어요. 그때 자유로 공사 중이었거든요. 일산 신도시도 없고 가양대교도 방화대교도 없던 때죠. 그냥 쓰레기 산이었어요. 거기에서 바람이 불면 먼지가 얼마나 많은지, 온몸에 먼지가 쌓여 눈사람이 된 채로 두 시간을 성산대교까지 걸어왔어요."
교도소와 법정을 쫓아다니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외침의 첫머리에는 유 작가의 동생이 있다. 알려진 대로 그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국어교사로 지내던 1984년, 동생인 유 전 장관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 연루돼 감옥으로 끌려갔다. 유 작가는 그 길로 투쟁을 시작했다. '의를 구하는 자는 죄인입니까.' 동생의 구속 소식을 듣고 서울대 총학생회에 찾아가 붙인 대자보의 첫 구절이다.
"순둥이, 순둥이, 그런 순둥이가 없었어요. 그런 동생이 잡혀가니까 뭐 눈이 뒤집혔죠. 당시에 동생처럼 잡혀간 학생들의 엄마는 나라가 자식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니까 겁을 먹었죠.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얼른 반성문 쓰고 나오라고 자식들을 설득하던 엄마들을 붙잡고 설득했어요. 당신의 아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참 아들 잘 길렀다고. 정의와 자유, 인권을 추구하는 올바른 학생이니까, 그 아들·딸을 살리려면 반성할 게 아니라 싸워야 한다고 했죠. 그렇게 민가협이 탄생했어요."
고추장으로 쓴 '전두환 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