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1월 8일 고문공대위 보고대회가 열린 혜화동 성당에서 열린 미사와 보고대회 전경
민청련동지회
'고문 반대" 농성에서 거리 시위로 확산뭇사람들의 관심과 긴장 속에서 보고대회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경찰은 수천 명의 사복 및 전투 경찰을 동원하여 혜화동성당 주위를 포위했다. 보고대회에 참석하려고 모여드는 시민들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과 문익환 민통련 의장을 비롯한 재야 민주인사들은 자택에 연금당했다. 시내 중심가 곳곳에도 기습 시위에 대비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관들을 배치했다. 마치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시민들은 공포감을 느꼈다.
결국 보고대회는 경찰의 통제로 개최되지 못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공대위 임원들과 민청련 여성들 70여 명은 혜화동 로터리에서 약식으로 보고대회를 열고 30분가량 노래 부르며 항의의 뜻을 표출했다.
시민대회 개최가 봉쇄되자 공대위는 실행 가능한 다른 방법을 택했다. 11월 11일부터 3일 동안 민추협 사무실에서 연합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고문수사와 용공 조작에 항의하는 것으로는 제5차 농성인 셈이었다.
이 농성에는 구속자 가족들을 비롯하여 민청련, 민통련, 충남민주운동협의회, 가톨릭농민회, 민중불교운동연합, 인천사회운동연합, 목민선교회, 민주헌정연구회, 신민당, 사민당, 민추협 등에서 100여 명이 참석했다. 참가 단체도 많아졌고 참가자 숫자도 훌쩍 늘었다. 농성자들은 이미 개발된 행동 전술을 되풀이 활용했다. 건물 앞뒤로 '살인적 고문 및 용공 조작을 즉각 중단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내걸었고, 핸드 마이크로 거리의 시민을 향해 구호와 노래를 전했다.
이처럼 규모가 커진 까닭은 구속자들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고문수사에 대한 시민의 공분이 고조됐기 때문이었다. 그즈음 민청련 탄압 사건 외에도 여러 시국 사건의 구속자들이 고문 수사와 용공 조작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삼민투 사건, 깃발 사건, 민추위 사건 등으로 체포된 사람들이 그러했다. 삼민투 부위원장 허인회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깃발 사건 연루자들은 "뜨거운 물에 거꾸로 처박혀 매를 맞으면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을 읽은 것으로 자백"하라고 강요당했다.
학생들만 대상이 아니었다. 9월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장 등 언론인 3명이 신문 보도와 관련하여 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가혹한 구타를 당했고, 대구교도소에서는 정진관 등 양심수 10여 명이 교도관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급기야 목숨을 잃는 희생자가 나왔다. 민추위 사건으로 도피 중이던 서울대 학생 우종원은 1985년 10월 11일, 경부선 철로 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는 불운하게도 추적자들에게 사로잡혔던 것 같다. 도대체 그에게 어떤 짓을 했던 것일까? 그는 시신 상태로 발견됐고, 그로부터 하루 만에 경찰의 강압에 몰려 서둘러 화장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도 그의 죽음은 고문치사의 결과이며, 서둘러 화장한 이유는 증거를 없애려는 의도 때문임이 분명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끊임없이 고문과 폭행을 자행하고 있었다. 도처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