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 선 목사3.1민주구국선언을 시작으로 민주화에 뛰어든 문익환 목사는 시인, 신학자, 목사 그리고 민중을 뜨겁게 사랑하는 선지자였다.
사단법인 통일의 집
구약성서를 번역하던 신학자, 민주화 운동에 나서다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명동촌은 함경북도에서 실학과 동학에 참여했던 유학자 네 가문이 두만강을 건너가서 만든 교육적 '대안 마을'이었다. 일제에 맞서는 학문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아버지 문재린은 3.1독립만세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네 번의 옥고를 치르고, 어머니 김신묵은 이동휘 선생의 딸과 함께 7인의 여자비밀결사대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익환은 송몽규, 윤동주와 어울려 명동학교를 다녔다. 특히 윤동주와는 평양의 숭실학교도 함께 가고, 신사참배 거부로 자퇴도 같이 했으며, 학교를 세 차례나 옮길 때도 늘 동행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 때 진보적인 신학을 접하고자 일본신학교에 유학하는데, 그 시절에 만난 전도사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한다.
목회 활동을 시작한 것은 도쿄 유학 5년째에 학병을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가서부터이다. 해방 후 서울에서 한국신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의 신분으로 정전 회담에 참여한다. 그 후 한국을 대표하는 구약학자로서 한신대, 연세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1968년부터 신·구교 공동 성서번역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76년에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면서 재야활동에 나선다. 이때가 59세였다.
문익환은 행동파 신학자 본회퍼를 좋아했다. 신학적 원리와 진리에 따라 어떤 박해나 오해 앞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독일의 신학자, 교회와 세상의 벽을 무너뜨린 본회퍼처럼 문익환도 재야운동에 몸을 던진 뒤 목숨을 내놓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다.
까닭에, 신학자이면서 시인이요, 목사이면서 재야운동가로서 그의 생애는 릴케의 <기도시집>을 번역하던 고요한 시절로부터 광야에 홀로 선 제사장처럼 독재자 앞에서도 포효를 멈추지 않던 투사의 시절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그가 이 땅의 역사의 흐름을 '죽임의 역사'에서 '살림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투옥된 기간은 총 6회에 걸쳐 도합 11년 3개월이 넘는다. 그러면서 단 한 번도 징역살이를 하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거나 덜 하려고 석방운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