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직장폐쇄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여성기숙사에 용역을 투입시키는 일이었다. 한 여름 공장 점거 투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KEC지회
1994년 3월 8일에 입사했다. 대우전자에서 일하다 친구 소개로 이직을 했다. 당시 KEC는 '한국전자'라는 이름이었다. 삐삐나 전자키보드, 텔레비전을 만들었다. KEC는 수익성이 보인다 싶으면 사업을 벌이고 접는 게 빠른 회사였다. 그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사업성이 떨어져 라인이 망해도, 곧장 다른 부서로 배치됐다. 튜너(자동차 안에 들어가는 주파수 맞추는 장치), 모듈(부품일종), 다음은 삐삐 같은 전자기기까지, 배치되는 부서마다 금방 망했다. 이런저런 사업들을 접고 지금까지 유지되는 게 반도체다. 지금 내가 일하는 부서는 자동차 부품 중 하나인 다이오드(반도체 일종)를 만드는 곳이다.
KEC가 다른 건 몰라도 지역에서는 나름 여성이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회사라고 믿었다. 대기업공장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KEC는 결혼을 했다고 불이익 주지 않는 회사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노동자들이 알아서 만족했다. 나만해도 부당한 일을 당해도 '회사는 어차피 돈 벌러 온 거잖아'하고 생각했다. 남녀임금차, 진급기회제한 같은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시키면 일하는 게 다였고, 그게 익숙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 숙련되니까 스스로 조금씩 업무 욕심도 났다.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받고 싶었다. 3교대를 해도, 다른 팀 생산 물량 봐가면서 경쟁하기도 했다. 인사고과를 잘 받으면 포상도 받으니까.
그런데 2010년 이후 그 모든 게 무의미해졌다. 회사가 공장부지에 주상복합 쇼핑몰을 세우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이후 노동자들은 남녀할 것 없이 공장과 같이 '정리해야할 대상'이 됐다. 그리고 가장 먼저 공장 밖으로 내쳐진 건 여성노동자들이었다.
가장 먼저 공장 밖으로 내쳐진 여성노동자회사가 공장폐쇄를 하려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새벽에 여성기숙사에 용역을 투입하는 일이었다. 2010년 6월 마지막 날은 지금까지 내 생에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사건이 됐다.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은 용역, 정문을 막아 선 컨테이너 박스, 기숙사를 쫓겨 나온 사람들의 울음소리. 우리는 쫓겨났다. 알아서 만족하며 안정적이라는 것 하나 믿고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는 꼭두새벽 용역을 투입해 끌어내고, 밀고 짓밟았다.
나는 결혼해서 공장 밖에 나가있어서 직접 끌려나오는 일은 피했다. 그런데 폭력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끌려나온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공장을 점거했다. 늘 점거 인원보다 몇 배는 많은 용역들이 호시탐탐 노동자들을 노렸다. 여성노동자들은 화장실조차 맘대로 갈 수 없었다. 450명으로 시작한 파업참가 인원이 점점 줄어 막판에는 100여명 정도 남았다. 처음 불안하지 않으려고 가볍게 생각하려고 했다. 집회분위기도 즐겁게 이어졌지만, 우리 인원은 줄고 용역은 점점 늘었다.
인원이 점점 줄어들면서, 한 명 나갈 때마다 서운함을 느꼈다. 물론 안쓰러운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가 아파서, 집에서 반대해서,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나라고 이유가 없었을까.
파업이 길어지면서 아이들 걱정이 컸다. 하루는 파업현장, 하루는 집에서 잤다. 아이들을 제대로 챙길 여력이 없었다. 딸이 일찍 철이든 것도 내 탓인 것 같다. 직장이 3교대다보니 야간근무가 종종 있었다. 딸은 일을 하러 가는 줄 알고 있었다. 더 어렸던 아들은 외할머니네 데려다 줬다. 아픈 남편이 홀로 딸을 챙겼다.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떠날 수 없었다. 내가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어땠을까. 내가 느낀 서운함, 서러움, 두려움, 그 기분을 다른 사람이 다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 차마 나갈 수 없었다. 회사에 버려진 이 사람을 내가 또 버릴 순 없었다.
조금 지나서는 악에 받쳤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이 솟았다. 회사 다 밀고 주상복합 쇼핑센터 지으려고 했다는 이야기 나왔을 때는 의도적으로 다 내보내고 돈 되는 것 하려고 그랬구나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우리가 전문직종은 아니지만 숙련자들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해도 농땡이 한 번 피운 적이 없었다. 나 빠지면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메워야 하니, 휴가 한 번 쓰지 않고 일했다. 그런 우리를 돈이 안 된다고 고장 난 기계처럼 갖다 버린다고 하니까 허무하고 화가 났다.
'나는 아니겠지' 나도 그랬다사회적 합의로 1년여 기간의 파업이 끝이 났다. 파업은 끝났는데, 분위기가 삭막했다. 마지막까지 파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지켜봤다. 나는 파업 기간 회사와 용역들에게 수모를 당해보니까 공장에 돌아와서 오히려 깡다구가 생겼다. 그런데 7주의 교육기간동안 못 견디고 퇴사하신 분들이 많다.
공장안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은 등급이 생겼다. 신입, 기존, 복귀. 우리는 '복귀', 파업 대오에서 벗어나 어용노조가 된 사람들은 '기존', 파업 기간 대체인력으로 뽑은 '신입'. 회사는 이렇게 공장 안 우리들을 갈라놨다. 복귀 후 새로 배치받아서 교육 받을 때는 우리끼리 모여있기 때문에 버티고 있을 힘이 더 났는데, 배치 후에는 모두 떨어뜨려놔 고립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아니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일하는 면에서 자신감을 갖고 있는 친구들도 많다. 이제는 그냥 웃음이 나온다. 우리도 처음엔 그랬다. 회사에서 하라면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 내가 불이익을 볼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회사는 노동자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회사에는 회사의 '돈 되는 사정'만 있을 뿐이다. 지금도 공장부지를 팔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회사가 주상복합쇼핑몰을 포기하지 않으면, 지금 공장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2010년이 우리에게 남긴 건 압류되는 임금만이 아니다.
지금 내곁에는 2010년과 이후 질곡을 함께 한 동료들이 있다. 똑같이 최저임금 수준을 제외한 나머지를 압류당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더하지 않기 위해 힘들어도 하루하루 견뎌내는 동료들.
그리고 지난 15개월, 불평한 번 없이 허리띠 졸라매며 힘이 되어주는 가족이 있다. 다들 살아보려고 한다. 딸에게 많이 고맙다. 가족이라도 팍팍한 삶에 서로 가시를 세우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딸이 중재도 한다. 크리스마스에 딸이 사는 밥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전 날은 아들 생일이다. 철 없는 아들은 생일선물 두 배로 달라고 한다. 마음은 몇 배를 못 줄까. 부자가 되길 바라진 않는다. 압류가 풀리길 기다린다. 이제 21개월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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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 (주)KEC에 있는 민주노총 금속노조소속 지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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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일하기 좋은 직장? 여성이 가장 먼저 내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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